1990년 전후 탈냉전 바람을 타고 성사된 한국과 소련의 국교 수립을 둘러싼 막후 외교가 공개됐다. 노태우 정부는 소련과의 수교 시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소련을 회유했고, 북한은 소련과의 외교관계 축소를 거론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외교부는 29일 이 같은 내용을 포함한 30년이 지난 외교문서 1,014권(33만여 쪽)을 일반에 공개했다.
우리 정부는 1990년 내 수교를 목표로 소련에 접근했다. 비공식 외교채널까지 총동원해 소련 측에 정상회담 의사를 타진했고, 양측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인 그해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양국 첫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북한을 의식해 정상회담을 포함한 수교 관련 사항에는 '태백산'이란 암호명을 붙여 극비리에 추진했다.
노태우 정부가 소련과의 수교에 얼마나 공들였는지는 1989년 4월 홍순영 외무부(현 외교부) 2차관보와 소련 극동문제연구소 학술지 편집장(FEA)과의 면담기록에 잘 나타난다. FEA편집장은 한소 수교 시 "주한미군 철수를 검토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홍 차관보는 "국제사회의 보장과 (주변) 4강의 교차 승인 등이 보장된다면 주한미군 철수도 검토할 수 있다"고 답했다.
'북방외교'를 추진한 노태우 정부와 개혁·개방 노선을 선언한 소련 간 화해 분위기에 북한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1989년 1월 방한한 미구엘 스테클로프 소련 연방장관은 "(김일성 주석과) 소련 외무장관 간 (한소 수교에) 심각한 의견 대립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국 측에 전했다. 김 주석은 1988년 12월 평양을 방문한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에게 "(한소관계를) 정상화하면 주모스크바 대사관 이외의 공식 사절단을 전원 철수하겠다"고 위협했다.
북한을 자극해선 안 된다는 공감대 속에 1990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 호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 만남이 성사됐다. 회담을 불과 이틀 앞두고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합의할 만큼 막판까지 살얼음판이었다.
회담 후 김종인 경제수석비서관(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김종휘 대통령 외교안보보좌관을 단장으로 한 정부대표단은 8월 2~7일 소련을 방문해 국교 수립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연내 체결을 희망한 한국과 이듬해(1991년) 1월 1일 수교를 원했던 소련 간 입장차는 좁히지 못했다.
당시 최호중 외교부 장관은 9월 30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한소 외교장관 회담에서 "떳떳한 일을 할 때는 주저할 필요가 없다"며 곧바로 수교를 발효시키자는 파격 제안을 던졌다. 이에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전향적 반응을 보이자, 최 장관은 "오늘 날짜로 수교하자는 데 동의하는 것인가"라며 되묻기도 했다.
소련은 당시 공동발표문 초안에 수교일을 '1991년 1월 1일'로 적어뒀고, 우리 정부는 '0년 0월 0일'로 공란으로 남긴 채 협상을 진행하던 차였다. 현장에서 '1990년 9월 30일'로 전격 합의하면서 즉석에서 한국은 날짜를 기입했고, 러시아도 기존 날짜를 고쳐 적으며 역사적 국교 수립이 이뤄졌다.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남북 유엔 동시 가입(1991년 9월)에 대한 북한의 방해 공작 정황도 담겼다. 1989년 외교부가 입수한 북한의 외교문서에는 '유엔과 그 회원국은 한반도 통일을 저해하려는 조치를 삼가야 한다'는 내용이 적시됐다. 이에 주나이지리아 북한 대사관 측은 나이지리아 당국에 6·25 북침설을 제기하며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불가 주장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말레이시아 북한 대사관 측도 남북 유엔 동시 가입 문제에 대한 말레이시아의 중도적 입장을 촉구했다.
우리 정부는 유엔에서 막강한 거부권을 가진 중국과 소련 설득에 집중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에 중국에 대한 설득을 요청했다. 소련에는 국교 수립 과정에서 남북 유엔 동시 가입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