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3월 31일 개봉)를 보고 있자면 종종 주인공이 누군지 헷갈린다. 흑산도로 유배돼 어류도감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인가. 작품의 후반부를 주도하는 청년 어부 창대인가.
사실상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근대로 나아가던 19세기 초 조선을 추동하던 시대정신이다. 감독은 정약전이 어떻게 ‘자산어보’를 쓰게 됐는지 설명하는 척하면서 당시의 실학자들이 어떤 사상을 품고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는지 파고든다. 영화는 상징적으로 두 지식인을 내세운다. 정약전과 동생 정약용.
현실주의자로서 사회를 개혁하려 했던 정약용과 달리 영화 속 정약전은 임금도 양반도 상놈도 없는 세상을 꿈꾸는 급진적 이상주의자다. 이준익 감독은 유배생활로 인해 만날 수 없었던 두 인물을 직접적으로 대비시키는 대신 정약용의 자리에 창대를 세워 당시의 시대정신을 탐구한다.
‘자산어보’는 요즘 사극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상기시켜주는 작품이다. 역사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 과거의 시대정신을 화면 속으로 옮기려는 진지한 고민. 그럴싸한 포장을 위해 역사를 끌어들이는 가짜 사극이 주를 이루는 시대에 점점 드물어지고 있는 것들이다.
최근 편성 폐지된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는 그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사실 처음엔 무슨 유난인가 싶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완벽한 역사 고증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나’ ‘작가의 상상력을 어느 정도는 용인해줘야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막상 드라마를 보고 나니 SBS의 결정에 어느 정도 수긍이 됐다.
‘조선구마사’엔 엔터테인먼트 업계 내부에 누적된 나태한 역사ㆍ사회 인식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는 “‘고증 같은 거 왜 따지냐? 재밌으면 그만이지’ 하던 분들의 무신경함이 다년간 쌓여서 결국 '조선구마사'로 이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선구마사’ 사태는 국내 사극들의 병폐가 축적된 결과라는 것이다. 대중의 반중감정을 건드린, 현재 사회에 대한 무신경함도 빼놓을 수 없겠다.
철저한 역사 고증이 필수적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위해 일부는 양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상력만큼 중요한 것도 있다. 이를테면 에이브러햄 링컨을 뱀파이어 영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울 순 있지만 그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묘사해선 안 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그린다면서 램지어 교수의 공상을 옮기는 건 곤란하다.
요즘 제작되는 TV 시대극은 역사를 장치나 도구로만 가져다 쓸 뿐 시대의 공기, 인물의 정신을 재현하는 데는 별의지가 없어 보인다. 한두 편이 그렇다면 몰라도 다수가 그러니 문제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 당시의 공기로 호흡하며 사고해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옷과 가발을 뒤집어 쓴 채 코스프레 현대극을 한다. 판타지나 스릴러, 청춘 로맨스 같은 장르물과 결합할 때 이런 나태함은 최고조에 이른다.
역사는 전공자의 전유물도 아니고 건드리면 안 되는 성역도 아니다. 역사를 박제화하지 않고 살아 숨 쉬게 하기 위해선 가끔 도발적 상상력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에 손을 대려면 최소한의 존중과 이해가 있어야 한다. 영국 역사가 E. H.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그것이 참이라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과거에 귀 기울이지 않고 현재에도 무관심한데 역사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