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운하 사고와 모래폭풍

입력
2021.03.28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이집트에는 3월 말~5월 초 숨막히는 열풍 캄신(함신)이 분다. 사막지역에서 불어오는 모래폭풍인데 50일 동안 분다고 해서 아랍어로 50을 뜻하는 캄신으로 불린다. 중국과 몽골 내륙에서 발생해 봄철 우리를 괴롭히는 황사도 모래폭풍의 일종이다. 흙빛 세상을 만드는 캄신이 심하면 항공기 운항이 중단되고, 수에즈운하가 폐쇄되기도 한다. 중동에서 벌어진 역대 분쟁들은 캄신을 피해 진행됐을 정도다.

□ 중국에서 네덜란드 로테르담으로 가던 컨테이너선 에버 기븐호가 23일 오전 수에즈운하에서 좌초했다. 균형이 흔들리며 뱃머리와 선미가 운하 제방에 부딪혔고, 바닥 모래와 진흙에 배 밑바닥이 박혀 버렸다. 폭 280m에 불과한 운하를 길이 400m의 초대형 화물선이 비스듬히 가로막은 것이다. 흥미로운 건 사고가 모래폭풍과 강풍 탓이란 대만 해운사 에버그린의 주장이다. 산처럼 쌓인 컨테이너들이 바람을 받자 거대한 돛 역할을 해 배의 방향이 틀어졌다는 얘기다.

□ 영화 ‘미션임파서블4’의 한 장면인 모래폭풍 속 추격전을 떠올리면 일견 이해가 가는 주장이다. 과거 이슬람 사회는 모래폭풍이 불 때 발생한 범죄는 감경까지 해주었다. 이번 사고 당시에도 시속 74km가 넘는 강풍이 불고, 모래폭풍으로 가시거리는 짧았다고 한다. 그러나 수에즈운하 당국은 다른 배들이 같은 조건에서 운행했다는 점에서 조작 실수인 인재일 가능성이 높다고 의심하고 있다. 선박 견인도 하기 전에 책임 공방을 벌이는 이유는 물류 대란에서 보듯 엄청날 보상 때문이다.

□ 세계 물류의 10%를 차지하는 수에즈운하가 사고로 막힌 건 처음이다. 운하 주변에는 선박 400여 척이 '수에즈 잼'을 일으키고 있는데 하루 100억 달러 교역이 멈춰선 것으로 추정된다. 예인 작업이 길어지자 항공, 해상 운송료, 유가는 들썩이고, 일부 화물선들은 10~12일이 소요되는 남아프리카 희망봉 경유 노선으로 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리로 수위가 높아지는 29일 전후 견인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운하가 정상화 돼도 유럽과 아시아는 거리가 40% 짧은 북극항로를 검토할 때가 된 것 같다.

이태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