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의료계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자고 일어나면 처음 보는 최첨단 의료장비가 병원에 들어서고, 그에 맞는 새로운 의료 트렌드가 생겨났다. 특히 산부인과에서는 사람의 손길 없이 아기들을 돌볼 수 있을 정도로 의료기술이 발전했다. 많은 인큐베이터에는 ‘건드리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붙을 정도였다.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간 조산아들은 소리치며 울었지만 간호사들은 아기를 안아서 달래주지 않았다. 규정상 금지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발육에 필요한 영양과 의료학적 처치가 아낌없이 제공됐음에도 조산아들은 잘 자라지 못했다. 심신의 건강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많은 수가 중도에 생명을 잃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몇몇 병원의 조산아들이 똑같은 위험을 멋지게 뚫어내고 신체적·정신적으로 균형 잡힌 성장을 이어간 것이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오랜 시간의 추적조사 끝에 조산아들의 미래를 가른 사소한 차이가 밝혀졌다. 해당 병원의 야간 당직 간호사들이 우는 아기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밤마다 팔로 안아 달래서 재운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학자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여러 연구결과, 신생아들이 ‘최초의 언어인 촉각’을 통해 세상과 대화하는 법을 터득하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힘을 기르며, 인지 발달 능력까지 키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큐베이터 안에 갇혀 울어대는 어린 생명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간호사들의 ‘본능적 일탈’이야말로 그 어떤 의료 개입보다 강력한 치료제였음을 과학이 입증해낸 것이다. 어디 신생아뿐일까? 구성원들 간 긴밀한 접촉이 가져다주는 여러 효용가치에 대해서는 이제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만큼 많은 연구가 축적된 상태다.
며칠 전, 코로나19 상황의 고독과 싸우기 위해 소를 껴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외신 보도를 읽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고 포옹하는 게 어려워진 이들이 상대적으로 감염 위험이 낮고 몸집이 큰 소를 안으며 위안을 얻는다는, 그리하여 소 끌어안기 프로그램을 사업 아이템으로 끌어들인 농장에 예약자들이 줄을 서고 있다는 얘기였다. 수개월째 고립된 생활을 해오던 중 자신의 무릎에 안긴 커다란 소의 체온을 느끼는 순간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는 한 여성 심리학자의 사연을 소개하던 신문은, 소 포옹이 스트레스 억제 호르몬인 옥시토신 분비를 활성화한다고 덧붙였다. 기묘한 기분 한편으로 당연한 흐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생적으로 인간은 서로 쓰다듬고 부둥켜안는 것으로 치유와 안녕을 얻도록 설계된 피조물이므로.
한데 속속 드러나는 신경과학 연구들은 한 발 더 나아간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연인과 키스할 때 왕성하게 분비되는 일명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이 정신적·감정적으로 행복한 일을 경험하는 순간에도 퐁퐁, 샘솟는다는 사실 말이다. 적어도 신경과학의 시선으로 볼 때 정서적 ‘접촉’은 은유가 아니라 직유인 셈이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소를 끌어안기 어려운 우리가 할 일들은 따로 있다. 부모와 친구, 이웃들과 다정하게 통화하기. 함께했던 추억을 소환하며 신나게 웃고 떠들기. 머잖아 함께할 일들의 목록 만들어 공유하기…. 그런 심리적 ‘접촉’만으로도 우리 서로는 소의 등짝보다 포근한 온기가 되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