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조 원이 넘는 규모의 코로나19 경기 부양 법안이 미국 의회를 통과했다. 경제가 살아나리라는 기대가 넘친다. 이 와중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법안 하나가 하원을 통과해 상원으로 넘어갔다. 민주당이 이번 회기 1호 법안으로 추진한 것인데, 투표권 보장을 위한 제도를 확대 및 재정비하는 내용이다. 유권자등록을 정부에서 담당하고 우편투표를 용이하게 하는 등의 내용이다. 법안이 상원을 통과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투표권과 관련된 이 이슈 자체는 미국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사실 남북전쟁 이후 지난 160년의 미국 역사는 투표권 확대와 제한의 여정이다. 노예해방과 흑인의 투표권 보장을 3차례의 헌법 개정으로 분명히 했지만, KKK와 같은 백인우월단체의 물리적 방해로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모든 남부 주에서는 다양한 제도를 통해 흑인에게서 투표권을 빼앗았다. 투표권을 가지려면 세금을 내야 했고, 문맹 및 소양 시험이 도입되어 흑인들만 훨씬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했으며, 심지어 당내 경선에서는 흑인이 아예 투표를 할 수 없었다.
이러한 불공정한 상태가 100년간 이어지다가 1960년대 들어서 연방의회와 연방대법원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비로소 멈췄다. 그리고, 이후 50년간 흑인뿐만 아니라 모든 유권자들이 투표를 쉽게 할 수 있도록 개혁이 이루어졌다. 선거 때마다 유권자로 먼저 등록한 이후에 투표할 수 있는 독특한 선거제도가 대상이었다.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면서 유권자 등록을 함께 할 수 있게 했고, 투표 당일에 유권자 등록이 가능하도록 한 주도 생겼다.
하지만, 2013년 연방대법원이 상황을 반전시켰다. 과거 흑인에게 투표권을 제한했던 역사가 있는 주는 투표 관련 법을 바꿀 때 연방 법무부의 승인을 거치도록 한 연방 민권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후 공화당의 주도로 소수인종의 투표권을 제한하는 많은 법이 여러 주의회를 통과했다. 대표적인 것이 유권자 등록과 투표 시 정부에서 발급한 신분증을 확인하도록 한 제도이다. 신분증이 없는 백인은 8%뿐이지만 흑인의 경우 무려 25%나 된다는 점을 악용했다. 연방 회계감사원에 따르면 이 제도가 실제 투표율을 2~3%포인트 감소시켰다고 하는데, 지난 두 번의 대선이 근소한 차이로 결정 났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1년 지금은 우편투표, 사전투표, 부재자 투표가 대상이다. 43개 주에서 250개 이상의 법안이 발의되었다. 공화당은 ‘선거부정’을 막고 선거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것이 목적이라지만, 흑인과 히스패닉 유권자들에게 불리한 변화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예를 들면, 조지아주에서는 일요일에 사전 투표를 대폭 축소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는데, 지난 선거에서 흑인 교회의 투표 독려 활동이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또, 부재자 투표를 신청할 때 그 이유를 설명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이 여러 주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지난 대선에서 박빙이었던 애리조나, 조지아, 펜실베이니아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연방대법원이 조만간 내릴 판결도 관심거리이다. 현재는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소수인종의 투표율을 현저히 낮추는 주 차원의 법을 금지하고 있는데, 애리조나주에서 투표권을 제한한 조치가 이에 해당되는지 여부이다. 최근 재판 과정에서 대법관들의 의견이 상당 부분 드러났는데, ‘투표율을 현저히 낮춘다’는 기준을 매우 높게 해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만약 이대로 판결이 난다면, 이후 공화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는 많은 주에서 보다 쉽게 제도를 바꿔 투표율을 낮출 수 있을 듯 보인다.
민주당의 1호 법안이 큰 관심도 못 받고 흐지부지될 운명에 처했는데, 공화당이 소리소문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