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예컨대 법률엔 입법 목적이 있고, 기관엔 설립 취지란 게 있다. 올해 1월 출범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도 마찬가지다. 검찰의 무소불위 권한을 분산하기 위해 탄생한 ‘또 하나의 수사기구’라는 말이다. 헌법기관인 검찰의 힘을 왜 빼야 했나 생각하면 답은 뻔하다. 정치적 수사를 한다는 비판 여론이 워낙 거셌다. 뒤집으면, 공수처가 최우선에 둬야 할 원칙은 다름 아닌 ‘정치적 중립’이 되는 셈이다.
김진욱 공수처장의 최근 행보는 낙제점에 가깝다. 김 처장이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출금) 의혹’ 사건 피의자인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과 면담했다는 소식을 듣곤 귀를 의심했다. “이 지검장 변호인 요청에 따른 면담 겸 기초조사”라지만, 수사 책임자가 본격 조사에 앞서 피의자와의 만남을 회피하는 건 불문율이다. 수사과정ㆍ결과의 공정성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성윤 지검장이 누구인가. 언론이 붙인 꼬리표라 해도, ‘친(親)정권 성향 검사’로 알려진 그는 실제로도 숱한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특히 ‘김학의 불법 출금 의혹’ 사건엔 정치적 성격도 짙게 배어 있다. 면담 사실 자체만으로도 온갖 정치적 해석이 뒤따르리란 걸 김 처장은 몰랐을까.
더구나 김 처장의 해명은 실소까지 자아낸다. “공수처는 인권친화적 수사기구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취지였는데, 도대체 면담 신청 수용 여부와 인권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반대로 면담 신청을 거부했다면, 그건 인권 침해인가. 다른 층위의 문제를 한데 뒤섞어 버린, 납득할 수 없는 변명이다. 김 처장의 인권감수성은 누구보다 뛰어나겠지만, 정치적 중립성 신뢰 확보와 관련해선 너무도 둔감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어떤가. 한명숙 전 국무총리 관련 사건에 대해 박 장관은 수사지휘권을 행사했고, 법무부ㆍ대검의 합동감찰도 지시했다. 경위나 배경, 명분에 설득력이 없진 않다. 하지만 본인 말마따나 “장관 이전에 국회의원”인 데다, 하필 한 전 총리 사건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계산된 행위’라는 해석은 꽤 자연스럽다. 오해를 피하고 정당성을 강조하고 싶었다면, 그는 최소한 “대검 부장ㆍ고검장 회의 결론을 존중한다. 수용하겠다”는, 딱 이 한마디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끝까지 하지 않았다. 설마 ‘정치인 장관’이니 정치적 중립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물론 정치적 중립성이 진정한 시험대에 오른 곳은 따로 있다. 검찰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위기를 초래한 건 ‘정치적 외풍’에 반발하며 떠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다. 그가 실제로 정계에 몸을 던지는 순간, 과거 검찰 수사뿐 아니라 향후 수사마저 정치적 색채로 물들 것이라는 점은 기정사실이 됐다.
윤 전 총장은 사임의 변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국민 보호에 온 힘을 기울이겠다”고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한국사회 민주주의 이행은 검사나 권력자가 아니라, 시민과 대중의 힘으로 가능했다. 그러니 자유민주적 기본질서(헌법상 문구)를 지키는 역할은 시민과 대중에게 맡겨 주시라. 윤 전 총장은 그보다는 ‘검찰주의자’ ‘전직 총장’으로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 해선 안 될 일’을 좀 더 고민해 주시는 게 정답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