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되면 같이 치료 온다던 70대 노부부, 하지만... 아내 혼자였다

입력
2021.03.30 21:00
25면
<5> 권해진 한의사

편집자주

의사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동네 작은 한의원에서는 여러 분야의 환자를 봅니다. 발목을 살짝 삐긋한 청소년부터, 늘 아프지만 침과 물리치료를 받으면 하루 이틀은 지내기 편하다는 어르신까지 다양한 환자가 찾아옵니다. 응급환자가 거의 없으니 어쩌다 다쳤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가족관계는 어떤지, 병 이야기부터 사소한 개인사까지 대화가 끝이 없습니다.

70대 노부부가 한의원에 처음 오신 건 7,8년전이었습니다. 예전부터도 한의원을 자주 다녔는데, 이번에 이사를 오게 되어 앞으로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허리치료를 받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남편은 키가 컸고, 아내는 아담한 키에 온화한 인상이었습니다. 한눈에 봐도 참 편안하고 사이 좋은 부부라는 걸 알수 있었죠. 치료실 침대에서도 두 분은 바로 옆자리에 누워 치료받기를 원할 정도였습니다.

남편은 60대에 뇌졸중을 겪으셨답니다. 덩치 큰 자신을 간호하느라 아내가 많이 고생했는데, 지극한 정성 덕에 이제 후유증은 거의 없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날이 추워지면 풍이 지나갔던 한쪽 다리에 힘이 없어져 걸어다닐 때 몇 번 넘어진 적이 있었고, 그래서 지금은 지팡이를 사용하신다고 했습니다.

“의사가 지팡이를 꼭 짚으라고 했는데 늙은이처럼 보이는 게 싫어서 대신 우산을 짚고 다녔어요. 그런데 몇 번 넘어지니까 도저히 안되겠더라구. 그래서 지금은 지팡이를 쓰는데 영 거추장스러워요. 원장님이 나 지팡이 안 쓰고 걸을 수 있도록 좀 해줘요.”

“아버님, 중절모 쓰시고 지팡이 짚으시니까 멋진 신사같으세요. 제가 최선은 다하겠지만 그래도 지팡이 너무 싫어하지는 마세요.”

부인은 허리치료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치료실에서 보니 허리 척추를 따라 큰 수술을 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언제 어떤 수술을 했는지 여쭤봤습니다.

“한 10년쯤 됐지. 병원에서 4, 5, 6번(요추)을 한꺼번에 묶었다고 했어요. 지금 허리 아픈 건 그 수술과는 상관없고, 그냥 나이가 들어서 아픈 거예요."

허리에 침치료를 하고, 물리치료도 하고, 뜨끈하게 찜찔까지 해드렸습니다. 남편은 코까지 골면서 주무셨는데, 부인은 저랑 이야기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저 양반 풍으로 쓰러졌을 때 내가 간호하다가 디스크가 터졌어요. 그때는 저 사람이 팔다리 못 쓰게 될까봐 나 아픈 거는 아예 신경을 못 썼지. 그러다 나중에 수술을 받았는데, 저 양반이 자기 때문에 내 허리가 이렇게 됐다고 너무 미안하게 생각해요. 허리 수술을 받고 내 병 수발은 저 이가 다 했어요.”

그 후로 몇 년간 꾸준히, 그리고 항상 사이좋은 모습으로 두 분은 한의원에 오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다음 주에 병원 검진이 있어서 한 2주 정도 못 올 것 같아요.”

“두 분 모두 검진이세요?”

“입원해서 하는 검사라 같이 하고 나오려구요.”

그런데 검진에서 남편 복부에서 종양이 발견됐고, 수술 앞두고 한의원에 오셨습니다.

“원장님, 내가 이번에 수술하러 들어가면 어쩌면 마지막일 것 같아요. 나 없어도 집사람 허리 안 아프게 잘 봐줘요.”

“그런 말씀 마세요. 걱정 말고 수술 잘 받으시고 건강하게 저 보러 다시 오세요.”

그렇게 인사는 했지만 사실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팔십을 앞둔 연세에 개복수술을 한다는 건 분명 부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부인이 찾아오셨습니다. 남편 수술은 잘됐는데 후유증이 좀 있어서 한의원에 한동안 못 올 거라고 하시더군요. 대신 본인 허리에 통증이 심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들이랑 번갈아가며 입원한 남편을 돌보는데 병실 간이침대가 좁아서 허리가 너무 아프다고요. 그렇다고 수술한 남편을 자식이나 간병인 손에 다 맡기고 싶지는 않고, 본인이 하는 데까지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 연세에 병수발하려니 얼마나 힘드실까, 말은 안 해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3개월이 흘렀습니다. 지난 겨울이었습니다. 모처럼 두 분이 함께 오셨습니다.

“내가 잘 회복되어서 우리 원장님하고 간호사선생님 얼굴이나 보러 들렀어요. 이제 겨울이니까 외출하기가 좀 조심스럽고, 봄 되면 꼭 걸어와서 예전처럼 침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을게요.”

모든 게 부자유스럽고 답답했던 코로나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습니다. 부인 혼자 한의원에 오셨습니다.

"아버님은 좀 어떠세요. 아직은 걸어오시기가 좀 힘드시죠. 그래도 수술 회복은 다 되신 거죠? 식사는 잘하시구요?"

반가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여쭤 봤습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분 표정을 보고 짐작은 했을 텐데 말이죠.

"원장님, 실은 어제가 그 이 49재였어요. 남편이 그렇게 가고 나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겨우내 집에만 있다가 이제야 왔네요."

남편은 평소 심장질환을 갖고 있었는데 암수술은 잘됐지만 기력이 많이 떨어졌고, 그 때문인지 지난 1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나는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님이 하늘에서 '또 나 때문에 저런다' 하며 미안해하실 거예요. 어머니 꼭 힘내세요."

함께 해(偕) 늙을 로(老). 오랜 세월 두 분을 보면서 나는 '이런 게 해로구나'라고 생각해왔습니다. 함께 늙고, 함께 아프고, 하지만 내 몸이 아파도 배우자부터 챙기고 보듬는 것. 하지만 영원히 그럴 수는 없겠죠. 그게 삶일 테구요.

인생에서 노년은 겨울입니다. 여름 같은 젊은 날 서로 만나, 화려한 가을에 가족을 이루고, 쓸쓸한 겨울이 되면 부부만 남거나, 또는 혼자가 됩니다. 젊고 화려한 날보다 아프고 안쓰러운 날들이 더 길 수도 있습니다.

요즘도 부인은 가끔 한의원에 오십니다. 내색은 안하시지만 많이 허전하신 것 같더군요. 그때마다 항상 남편과 함께 오시던 모습이 자꾸 떠오릅니다. 좀 더 해로하셨으면 좋았을텐데. 참 아름다운 부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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