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작은 한의원에서는 여러 분야의 환자를 봅니다. 발목을 살짝 삐긋한 청소년부터, 늘 아프지만 침과 물리치료를 받으면 하루 이틀은 지내기 편하다는 어르신까지 다양한 환자가 찾아옵니다. 응급환자가 거의 없으니 어쩌다 다쳤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가족관계는 어떤지, 병 이야기부터 사소한 개인사까지 대화가 끝이 없습니다.
70대 노부부가 한의원에 처음 오신 건 7,8년전이었습니다. 예전부터도 한의원을 자주 다녔는데, 이번에 이사를 오게 되어 앞으로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허리치료를 받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남편은 키가 컸고, 아내는 아담한 키에 온화한 인상이었습니다. 한눈에 봐도 참 편안하고 사이 좋은 부부라는 걸 알수 있었죠. 치료실 침대에서도 두 분은 바로 옆자리에 누워 치료받기를 원할 정도였습니다.
남편은 60대에 뇌졸중을 겪으셨답니다. 덩치 큰 자신을 간호하느라 아내가 많이 고생했는데, 지극한 정성 덕에 이제 후유증은 거의 없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날이 추워지면 풍이 지나갔던 한쪽 다리에 힘이 없어져 걸어다닐 때 몇 번 넘어진 적이 있었고, 그래서 지금은 지팡이를 사용하신다고 했습니다.
“의사가 지팡이를 꼭 짚으라고 했는데 늙은이처럼 보이는 게 싫어서 대신 우산을 짚고 다녔어요. 그런데 몇 번 넘어지니까 도저히 안되겠더라구. 그래서 지금은 지팡이를 쓰는데 영 거추장스러워요. 원장님이 나 지팡이 안 쓰고 걸을 수 있도록 좀 해줘요.”
“아버님, 중절모 쓰시고 지팡이 짚으시니까 멋진 신사같으세요. 제가 최선은 다하겠지만 그래도 지팡이 너무 싫어하지는 마세요.”
부인은 허리치료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치료실에서 보니 허리 척추를 따라 큰 수술을 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언제 어떤 수술을 했는지 여쭤봤습니다.
“한 10년쯤 됐지. 병원에서 4, 5, 6번(요추)을 한꺼번에 묶었다고 했어요. 지금 허리 아픈 건 그 수술과는 상관없고, 그냥 나이가 들어서 아픈 거예요."
허리에 침치료를 하고, 물리치료도 하고, 뜨끈하게 찜찔까지 해드렸습니다. 남편은 코까지 골면서 주무셨는데, 부인은 저랑 이야기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저 양반 풍으로 쓰러졌을 때 내가 간호하다가 디스크가 터졌어요. 그때는 저 사람이 팔다리 못 쓰게 될까봐 나 아픈 거는 아예 신경을 못 썼지. 그러다 나중에 수술을 받았는데, 저 양반이 자기 때문에 내 허리가 이렇게 됐다고 너무 미안하게 생각해요. 허리 수술을 받고 내 병 수발은 저 이가 다 했어요.”
그 후로 몇 년간 꾸준히, 그리고 항상 사이좋은 모습으로 두 분은 한의원에 오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다음 주에 병원 검진이 있어서 한 2주 정도 못 올 것 같아요.”
“두 분 모두 검진이세요?”
“입원해서 하는 검사라 같이 하고 나오려구요.”
그런데 검진에서 남편 복부에서 종양이 발견됐고, 수술 앞두고 한의원에 오셨습니다.
“원장님, 내가 이번에 수술하러 들어가면 어쩌면 마지막일 것 같아요. 나 없어도 집사람 허리 안 아프게 잘 봐줘요.”
“그런 말씀 마세요. 걱정 말고 수술 잘 받으시고 건강하게 저 보러 다시 오세요.”
그렇게 인사는 했지만 사실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팔십을 앞둔 연세에 개복수술을 한다는 건 분명 부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부인이 찾아오셨습니다. 남편 수술은 잘됐는데 후유증이 좀 있어서 한의원에 한동안 못 올 거라고 하시더군요. 대신 본인 허리에 통증이 심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들이랑 번갈아가며 입원한 남편을 돌보는데 병실 간이침대가 좁아서 허리가 너무 아프다고요. 그렇다고 수술한 남편을 자식이나 간병인 손에 다 맡기고 싶지는 않고, 본인이 하는 데까지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 연세에 병수발하려니 얼마나 힘드실까, 말은 안 해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3개월이 흘렀습니다. 지난 겨울이었습니다. 모처럼 두 분이 함께 오셨습니다.
“내가 잘 회복되어서 우리 원장님하고 간호사선생님 얼굴이나 보러 들렀어요. 이제 겨울이니까 외출하기가 좀 조심스럽고, 봄 되면 꼭 걸어와서 예전처럼 침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을게요.”
모든 게 부자유스럽고 답답했던 코로나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습니다. 부인 혼자 한의원에 오셨습니다.
"아버님은 좀 어떠세요. 아직은 걸어오시기가 좀 힘드시죠. 그래도 수술 회복은 다 되신 거죠? 식사는 잘하시구요?"
반가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여쭤 봤습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분 표정을 보고 짐작은 했을 텐데 말이죠.
"원장님, 실은 어제가 그 이 49재였어요. 남편이 그렇게 가고 나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겨우내 집에만 있다가 이제야 왔네요."
남편은 평소 심장질환을 갖고 있었는데 암수술은 잘됐지만 기력이 많이 떨어졌고, 그 때문인지 지난 1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나는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님이 하늘에서 '또 나 때문에 저런다' 하며 미안해하실 거예요. 어머니 꼭 힘내세요."
함께 해(偕) 늙을 로(老). 오랜 세월 두 분을 보면서 나는 '이런 게 해로구나'라고 생각해왔습니다. 함께 늙고, 함께 아프고, 하지만 내 몸이 아파도 배우자부터 챙기고 보듬는 것. 하지만 영원히 그럴 수는 없겠죠. 그게 삶일 테구요.
인생에서 노년은 겨울입니다. 여름 같은 젊은 날 서로 만나, 화려한 가을에 가족을 이루고, 쓸쓸한 겨울이 되면 부부만 남거나, 또는 혼자가 됩니다. 젊고 화려한 날보다 아프고 안쓰러운 날들이 더 길 수도 있습니다.
요즘도 부인은 가끔 한의원에 오십니다. 내색은 안하시지만 많이 허전하신 것 같더군요. 그때마다 항상 남편과 함께 오시던 모습이 자꾸 떠오릅니다. 좀 더 해로하셨으면 좋았을텐데. 참 아름다운 부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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