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경기 여주시에서 농사를 짓는 전영준(가명ㆍ50)씨는 컨테이너가 설치된 땅을 바라보면서 연신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전씨가 응시하던 땅은 2년 전까지만 해도 땅 주인에게 임차해서 경작했던 논이었다. 하지만 토지 소유주가 바뀌자 새로운 땅 주인은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짓겠다며 전씨와 농지임대차 계약을 하지 않았다. 전씨는 10년 넘게 땀 흘려 일궜던 농지를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영원히 농지로 이용될 줄 알았던 땅에 컨테이너 창고가 들어선 것은 지난 겨울이었다. 전씨가 벼를 일궜던 농지의 용도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하지만 이 땅은 농지원부나 토지대장에는 여전히 농지로 분류돼 있었다. 전씨는 “정부에서 농지 관리를 제대로 하겠다고 나섰다는데 이런 경우를 보면 황당할 따름"이라며 혀를 찼다.
정부가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부동산 투기 의혹을 계기로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토지 소유 자격요건 강화 및 농지법 개정 등의 개선책을 내놓고 있지만, ‘땜질식 처방’이란 지적이 나온다. 농지 정보가 통합관리되지 않고 정부 기관들에 흩어져 있는데다, 장부에 적힌 농지 정보와 실제 현장과의 괴리도 커서 불법 행위를 적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23일 한국일보가 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농어촌특위)로부터 받은 ‘농지 소유 및 이용 제도개선 방향과 과제’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9~12월 경기와 경남 일부 지역 농지 8,128필지를 조사해 얻은 실제 농지 정보와 행정기관에 기록된 정보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지난 22일 경기 지역 농지 소유 및 이용실태 조사를 맡았던 농어촌특위 담당자와 동행해 마을 이장 등 농민들을 만나 취재한 결과 불법이 판치는 농지 이용실태를 생생히 확인할 수 있었다. 경기 여주와 안성 지역 일부 농지의 경우 행정자료상에는 본인이 직접 경작한다고 적시돼 있었지만, 토지 소유주가 자경(自耕)을 하지 않고 임대농을 둔 상태였다. 여주시에서 벼농사를 짓는 농민 배모(63)씨는 6년째 농지 소유주와 임대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있다. 소유주가 자경한 것으로 위장해 세금을 감면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조세특례제한법상 8년간 자경한 농지의 소유주는 최대 2억 원의 양도소득세를 감면 받을 수 있다. 배씨는 “땅 주인이 임대계약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은 뻔하다. 세금도 안 내면서 나중에 농지를 비싼 값에 팔아먹으려는 의도”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농어촌특위가 여주시 일부 지역의 임대농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농지 임대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고 응답한 비율은 64.6%에 달했다.
땅 주인들이 이처럼 허위로 자경을 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보니 농지 소유주와 임대농 사이의 착취구조는 더욱 공고화해졌다. 농지를 실제로 경작한 농업인에게 보조금 형태로 지급되는 공익직불금이 임대농이 아닌 소유주에게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다. 심지어 임대차 계약을 하지 못한 임대농들은 소유주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다. 5,000㎡ 농지에서 임대농으로 일하는 김모(48)씨는 “소유주가 농지임대 계약을 맺지 않은 대신 임대료를 대폭 낮췄고, 120만 원 가량의 직불금은 소유주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다”며 “조선시대 병작반수제(소작인이 지주에게 소작료를 낼 때 수확량 반절을 내는 것) 못지 않은 횡포”라며 울분을 토했다.
농지가 보조금을 받고 양도소득세를 감면 받는 투자 대상으로 자리잡으면서 비영농인이 투기 목적으로 사들이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다. 경기 안성에서 30년 가까이 벼와 감자 농사를 짓는 마을 이장 강우전(가명ㆍ61)씨는 “지난해 10월 농어촌특위가 조사하러 왔을 때만 해도 농지가격이 평당 15만 원이었지만 최근엔 23만 원까지 치솟았다”며 “인근에 산업단지와 아파트가 들어서다 보니 외지인들이 매물을 내놓으라고 성화지만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마을 한 필지의 토지대장을 살펴보니, 지난해 특정 부동산이 평당 17만 원에 매입한 직후, 20명에게 '필지 쪼개기'로 판 것이 확인됐다. 20명의 구매자 중 4명은 농업경영, 16명은 주말체험 영농목적으로 농지를 취득했다고 신고했지만 해당 농지는 흙더미로 덮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건물을 지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마을 사람들은 “농지를 구입하자마자 필지를 쪼개서 흙을 덮어버린 행위는 사실상 농지 전용의 예행 단계에 해당한다”고 입을 모았다. 농어촌특위 보고서에서도 "이 지역에 영농목적으로 농지를 소유하고 있지만 실제로 타지에 살고 있는 부재지주 비율이 32.8%나 된다"고 기록했다. 가족 대대로 농지를 소유했다가 수년 전 농지를 팔고 임대농으로 일하는 최이근(가명ㆍ53)씨는 “비싼 값에 농지를 사겠다는 외지인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면서 “주변 농지 역시 경기 고양과 전남 나주 등 전국에서 몰려든 부재지주들이 사들였다”고 말했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 속에서 부재지주의 꼼수도 속속 드러났다. 지난해까지 논으로 사용됐던 경기 안성 농업진흥구역 내 농지, 이른바 '절대농지'에는 한 달 사이 여섯 동이 넘는 곤충사육사가 들어섰다. 농지법에 따르면 농업진흥구역은 농업과 직접 연관이 없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지만, 버섯재배사와 곤충사육사 설치는 농지 활동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법망을 악용해 텅 빈 곤충사육사 지붕 위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해 사실상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농지가 곳곳에 눈에 띄었다. 박흥식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사실상 농지 활동으로 가장해 농지 본연의 목적을 훼손시키는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농지에서 다양한 불법행위가 만연하고 있지만, 서류상 정보가 현실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다 보니 제대로 관리감독이 되지 않고 있다. 농어촌특위 전수 조사를 진행한 이문호 경남연구원 연구위원은 “지금과 같은 방식의 농지실태 조사로는 지방자치단체의 인력·예산 부족과 조각조각 흩어진 정보로 인해 농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면서 “농지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농업회의소나 농민단체, 주민이 함께 참여해야 실효성 있고 정확한 정보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농어촌특위는 앞서 농림축산식품부(농식품부) 농지과, 공익직불정책과, 한국농어촌공사, 법원행정처 협조를 구해 토지대장, 농지 원부, 농지조서, 농지이용 실태조사자료, 농업경영체 등록정보, 등기 정보자료 등 농지 관련 행정자료를 확보한 뒤, 현지 농민들을 통한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행정자료와 실제 정보를 비교·분석했다. 보고서에는 개별 필지에 대한 △기본정보(필지번호, 공부ㆍ실제지목 자료) △소유(소유자 정보와 소유 형태) △이용(경작자명, 농지이용 현황) △정책(직불금) 등의 정보가 상세히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