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고학에서 1980년대 초까지는 ‘최초’ 아니면 ‘미스터리’인 것들이 많았다. 발굴한 지 40년이 지난 수양개 유적도 지금 회고해보면 그 인류사나 민족사적인 가치를 잘 모르고 있던 유적이다. ‘수양개’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지명에 쓰이는 ‘개’라는 어미는 바닷물이나 강물이 드나드는 곳을 가리키며, 특히 강을 건너는 나루가 있는 장소에 많다. 충북 단양군 단양읍에서 영남으로 향하는 관문인 죽령을 오르려면 먼저 남한강을 건너야 한다. 수양개는 그 남한강 다리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건너편 강변이다. 소백산을 넘어 영남의 순흥과 풍기로 넘어가는 나루터이면서 옛날 남한강 수운의 중간 기착지이기도 하다.
단양 지역은 고대부터 산과 강이 어우러진 풍광으로 유명하다. 단양팔경 중 하나로 조선 건국 공신 정도전이 즐겼다는 도담삼봉(嶋潭三峰)이 강물 위에 평화스럽게 떠 있는 풍경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단양읍의 맞은편에 있는 양방산 정상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면서 내려다보면, 강물이 단양마을을 휘돌고 수양개를 지나 청풍 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모습에서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좁은 골짜기가 이어지는 이 곳은 많은 역사를 간직한 장소이기도 하다. 단양 지역에는 고구려의 남진 흔적이 남아 있다. 온달산성도 고구려의 유산으로 추정되고 있고, 지난 1995년 내가 외곽지역에서 발굴한 '태장이 묘(온달 장군의 무덤으로 전해진다)'도 고구려의 계단식 적석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유적들에서 고구려 시대의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 신라와 가야 지역까지 남하했다는 점을 영일의 냉수리고분, 순흥의 벽화고분 등 영남 지역에 남아 있는 고구려 관련 유적과 역사 기록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북쪽 지역에 살던 고구려 사람들이 지나간 곳이 바로 이곳 단양이고, 그 나루터가 수양개일 것이다. 엄청난 규모의 구석기 유적은 이곳이 까마득한 선사 시대에도 사람들이 남북을 오가던 길목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읍내에서 아침 일찍 나서는 길. LED 조명으로 장식된 폐터널을 지나 구석기 유적으로 향하는 길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마지막 이끼터널을 빠져나오자 수양개유적박물관이 반갑게 등장했다. 바로 옆 '빛의 터널'이라는 화려한 시설이 조금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일단 박물관에 들어서면 빙하시대를 대표하는 웅장한 매머드가 선사시대로 돌아간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유적박물관 일대에는 요 근래 지역개발사업에 힘입어 남한강뿐 아니라 멀리 소백산맥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만천하조망대 등 놀이시설이 들어서 있는데 꽤나 유명세를 얻은 모양이다. 도로 아래 강변을 따라서 나무마루(데크)로 이어진 길은 강변의 발굴 지점들을 지나 멀리 하류의 적성대교를 돌아서 단양으로 돌아오는데 이름이 ‘느림보강물길’이란다. 제3지구로 불리는 유적관 뒤편 언덕에서 주먹도끼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유적관 일대에도 대단히 오래된 구석기 유적이 잠자고 있으리라 기대된다. 유물이 다수 발굴된 지점은 500m 정도 떨어진 강변에 강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다. 충주댐 건설로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고대부터 버들이 많았다는 나루터 마을과 수양개 마을은 1차 발굴 시점까지 남아 있었다.
수양개 구석기 유적은 1980년 초 충주댐 건설 수몰지역 문화유적 조사과정에서 처음 발견됐다. 그 후 수년간의 발굴에서 ‘슴베찌르개’라는 특이한 석기가 다량으로 발견되어 동아시아 고고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석기 중에서도 나무나 뿔 손잡이에 끼워서 쓰는 '장착용' 석기는 처음 발견된 것이라 관심이 컸다. 슴베찌르개를 장착해서 만든 긴 나무창은 사냥할 때 위험을 줄일 수 있기에 이 시대의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손꼽힌다. 최근에는 수양개 하류지역에 수위조절댐을 설치하면서 제6지구를 발굴하게 되었는데 이 지점에서만 4만 점 이상의 석기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들은 후기구석기 유물로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반드시 알아야 할 문화유산이다. 수양개 돌날석기문화는 제6지구 발굴에서 얻은 방사성탄소동위원소 연대측정 결과 적어도 4만2,000년 전의 것으로 확인됐다. 이 연대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일 뿐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 본토 지역에서도 이렇게 오래된 후기구석기 돌날석기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중국 북쪽 내몽골의 수이동고우(水洞溝) 유적에서 비슷한 시기의 것들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석인'(石刃, blade)석기 또는 순우리말로 ‘돌날’이라고 부르는 도구는 어떤 석기일까. 석기 제작 기술을 요즘 디지털핸드폰 기술로 비교하자면 4G폰 단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양쪽으로 예리하고 길쭉한 날을 가지며 납작한 모양인데, 대단히 정교한 기술이어서 잘 만들어진 유리질 석기를 보면 구석기 시대 인간문화재의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석재를 구하러 수십㎞를 가는 것은 물론이고, 남한과 만주지역에서 발견된 백두산 흑요석의 경우에는 1,000㎞ 이상을 이동한 것이다. 수양개에서 이런 석인석기와 함께 발견된 석제눈금자는 전 세계 고고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 유물이다. 긴 원통형 돌에 정교한 간격으로 눈금을 새겼다. 아직도 수수께끼에 싸인 유물이지만 한반도 현생인류의 과학지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우리 민족의 기원을 '5,000년 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수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구석기 시대의 유물은 엄청나게 오래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현대인과는 다른 진화 단계의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오래 전 일이지만 선배 고고학자 한 분조차 "구석기 시대는 우리 민족사가 아니잖아. 국립박물관에 전시할 필요가 없어!"라고 농담조로 말씀하셔서 당시 신출내기 구석기 학자로서 억울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지만 후기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현대의 인류와 동일한 단계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이며 오늘날 한반도 사람들의 직계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수양개 사람들이 사용한 돌날(석인)석기문화는 동남아시아나 중국의 남부 지역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몽골 알타이 지방에서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한반도로 들어온 것이다. 수양개 유적은 단군 역사를 10배나 앞서는 대단히 이른 시기에 북방에서 건너와 한반도에 정착한 우리 조상의 문화를 간직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양개 유적에서 발굴된 슴베찌르개는 ‘한국형 후기구석기 문화’의 상징적인 유물이다. 슴베찌르개가 한반도에서 처음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극동지역에서는 유독 우리나라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 구석기 문화를 '슴베찌르개 문화'라고도 명명할 수 있다.
슴베찌르개의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이 수양개 유적의 가장 아래층에서 발굴되었다. 이 석기는 수양개 유적보다는 늦은 시기에 일본에서도 나타나는데, 일본 학자들도 한국의 슴베찌르개가 전파되어 서일본 '박편첨두기문화’의 원조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구석기 시대에 수양개 사람들이 죽령 고개를 넘어 낙동강을 따라 남하하다가, 해수면이 낮아지는 추운 시기에 좁아진 대한해협을 건너면서 서일본으로 확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구석기 시대 유라시아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의 한 갈래가 우리나라의 고유한 구석기 문화를 시작하고 일본으로 넘어간 흔적이 남은 곳이 바로 수양개 유적인 셈이다.
봄기운이 희미한 인적 끊어진 강변에서 황혼에 번쩍이는 강물과 흔들리는 갈대를 보면서 불현듯 의문이 떠오른다. ‘어떻게 생긴 사람들일까?’ 아, 그렇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상시바위그늘 유적에서 발굴된 상시사람(上詩人) 화석이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또 하나의 고고학적인 화두가 머릿속을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