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대파 한 단 가격이 1만 원에 육박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많은 사람들은 대파가 식탁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라 예상했죠. 하지만 늘 그랬듯 사람들은 방법을 찾았습니다. 대파를 직접 키우기로 한 것이죠. 그래서 생긴 말이 '파테크'입니다.
파테크는 파와 재테크를 합한 말입니다. 지난해 대비 가격이 몇 배나 오른 대파를 사먹느니 집에서 직접 키워 먹는 것이 재테크만큼이나 이득이 된다는 뜻인데요.
실제 올해 대파 값은 큰 폭으로 뛰었습니다. 도·소매 가격은 이미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인공지능(AI) 기반 농산물 데이터 분석기업 팜에어·한경에 따르면 18일 기준 대파(1㎏) 도매 가격은 3,837원으로, 지난해 같은 시기(699원) 대비 448% 상승했습니다. 1년 사이 값이 네 배 이상 뛴 대파를 비트코인에 빗댄 '대파코인'이라는 말이 나올 만하죠.
올해 3월 대파 가격은 2013~2020년의 같은 기간 평균 가격인 1,279원의 두 배가 넘고, 지난 7년 동안 가장 비쌌던 2,226원(2017년 3월)보다 무려 1,500원 이상 비쌉니다.
이 때문에 맘카페와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파테크 인증 대란이 일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해시태그에 '#대파', '#대파키우기'를 검색하면 수천 건의 게시물이 검색됩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대파 키우기' 영상은 조회수가 100만 건에 달합니다.
대파 키우기가 인기를 끌자 대형마트는 대파 재배 용품까지 내놓는 상황입니다. 롯데마트는 아예 '대파 홈파밍 용품전'이라는 행사를 열어 대파를 심을 수 있는 대형 화분과 화분 세트, 배양토 등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대파 자급자족이 인기를 끌게 된 건 '적은 비용으로 쉽게 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흙에 심거나 수경 재배하는 방법이 있는데 모두 시중에서 구매한 대파로 누구나 손쉽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키우는 방법도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일단 ①대파 뿌리를 자릅니다. ②이걸 배양토에 심거나 물에 담가 바람이 잘 통하고 햇빛이 드는 곳에 놓으면 약 2, 3주 후 길쭉한 새순이 올라옵니다. ③새순이 올라오면 자라난 부분을 잘라 먹고, 다시 길러 먹는 '무한리필' 시스템이 갖춰지는 것이죠.
이제 물을 주는 수고만 하면 됩니다. 흙에서 키우는 대파는 하루 1회 흙이 젖을 정도로 물을 주고, 물에서 키우는 대파는 물을 매일 갈아 줘야 합니다.
파테크 경험자들은 하나같이 만족도가 크다고 입을 모읍니다. 젊은 주부들이 많이 가입한 맘카페의 한 회원(yu***)은 "재택 근무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김에 파값이 금값이라는 뉴스를 보고 즉흥적으로 대파를 키우기 시작했다"며 "처음에는 대파를 잘라 먹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힐링"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회원(부***)은 "무엇보다 땅 한 평 없이도 직접 신선한 먹거리를 기르고 바로 먹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며 "파테크 성공 후기를 SNS에 올렸더니 지금은 주변 지인들이 너도나도 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대파를 심었더니 꽃이 피었다", "마트에서 사는 것보다 신선하고 맛있다", "한 달 넘게 대파를 안 사고 있다", "코로나19 시대에 집콕 취미로 딱이다" 등 파테크의 근황과 후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천정부지로 치솟다가 지난달 5,492원(도매가격)으로 정점을 찍은 대파 가격은 최근 하락세로 돌아섰습니다. 팜에어 분석에 따르면 도매 시장에서 대파 가격은 지난달과 비교해 13.37% 하락했고, 이달 말엔 ㎏당 3,500원대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가격 결정의 가장 큰 요인인 공급 여건이 개선된 덕분이죠. 봄 대파의 재배 면적이 지난해 대비 6.6% 증가하고, 정부가 냉동 대파 수입량을 늘리는 등 공급 여건이 좋아져 4월부터 안정세에 접어든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파테크를 안 해도 될까요? 전문가들은 제2, 제3의 대파 사태가 충분히 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올해 대파 값 폭등의 주요 원인은 지난 여름 이례적으로 길었던 장마와 겨울 한파, 폭설로 대파 생산량이 감소한 탓입니다. 이는 최근 수년 동안 이어진 지구 온난화·기후 변화와 밀접히 연관돼 있습니다.
권민수 팜에어·한경 대표는 "올해는 대파뿐 아니라 농산물 값이 사상 최고를 찍었는데 기후 변화의 큰 흐름 속에서 나타난 결과"라며 "농사는 환경 요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예기치 못한 기후 변수로 생산성과 품질이 전체적으로 떨어져 제품 가격이 오르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구조"라고 설명합니다.
팜에어·한경 측에 따르면 올해 3월 한국농산물가격지수(KAPI)는 160.97을 기록했습니다. KAPI는 코스피 지수나 코스닥 지수처럼 농산물 가격을 종합가격지수로 산출한 수치입니다. 2013년부터 2021년까지 22개 농산물의 적정 평균가격을 100으로 합니다. 160이라는 수치는 적정가 100을 기준으로 60%가 높다는 의미죠.
최근 3년 동안 KAPI 수치는 119(2018년), 109(2019년), 124(2020년)를 나타냈는데요. 특히 지난해부터 눈에 띄게 상승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당장 대파 가격이 안정되더라도 다른 먹거리 물가 상승이 또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한다는 게 현장의 예상입니다.
권 대표는 "어떤 농산물이 대파의 뒤를 이을지 예측하기는 어렵다"면서도 "날씨 의존도가 높은 콩, 감자 등 노지 재배 작물 중에 대파 사태와 같은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습니다. 노지 재배 작물은 재배면적이 거의 일정한 하우스 재배 작물과 달리 매년 날씨에 따라 재배면적이 다르고, 재배량이 들쑥날쑥하기 때문이죠.
다시말해 고온이나 저온, 폭우, 일조 부족 등 기후 위기가 심각해질수록 식탁 위의 씁쓸한 열풍이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머지 않아 콩테크, 감자테크 열풍을 보게 될지 모르죠. 때 아닌 파테크 인증 릴레이를 웃으면서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