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과 평양이 아직 펼쳐지지도 않은 가상의 협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외교ㆍ안보 수장은 첫 방한에서 북한을 자극하는 메시지를 쏟아냈고, 북한도 즉각 응수했다. 북미가 서로를 향해 "먼저 가드를 내리라"고 위협하는 형국이다. 양측이 탐색전을 끝낼 계기를 조기에 찾지 못하면,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의 대북 무시 전략인 ‘전략적 인내'의 시즌 2로 접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먼저 펀치를 날린 건 미국이다.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부 장관은 17일 한국 도착 직후 북한을 "자국민을 학대하는 권위주의 정권"이라고 직격했다. 얼마 전 뉴욕 채널을 통해 북한과 대화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진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였다.
하루 만에 대미 협상 실무 책임자인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나섰다. 18일 새벽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미국의 대조선(대북) 적대시 정책이 철회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조미(북미) 접촉이나 대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입장을 이미 밝혔다”며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미국의 접촉 시도를 무시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최 제1부상은 미국의 대화 제의가 사실이라고 확인하면서 "시간 벌이 놀음" "여론 몰이용"이라고 비난했다. 대화 시늉을 할 게 아니라, 대북 제재 해제 등 구체적 협상안을 가져오라는 뜻이다. 또 "우리와 한번이라도 마주앉을 것을 고대한다면 몹쓸 버릇부터 고치고 시작부터 태도를 바꿔야 한다”며 ‘트럼프식’의 북미 정상회담 개최도 기대하지 말라고 일격했다.
다만 협상 재개 가능성을 염두에 둔 듯 극단적 표현이나 도발 예고는 자제했다.
북한이 미국에 양보를 압박한 건 새롭지 않다. 주목되는 건 최 제1부상 담화가 발표된 ‘시점’과 ‘발신자’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미국 장관들의 방한 하루 전인 16일 한미연합군사연습(한미훈련) 비난 담화로 시동을 걸었고, 곧이어 최 제1부상이 등판했다. 대미협상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1, 2인자가 연이어 목소리를 내 대화의 문을 슬쩍 열어 둔 것이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의 대북 정책 수립이 늦어지자 조급해진 북한이 조건부 대화론을 꺼내 들었다”며 “한국 정부엔 더 적극적으로 미국을 설득해달라고 주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블링컨 장관은 북한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권 문제를 대북 압박 지렛대로 꺼내 흔들었다. 18일 한미 외교·국방(2+2) 장관 회담과 공동 기자회견에서 그는 “북한 권위주의 정권이 자국민에 대해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인권유린을 자행하고 있다”고 거듭 공격했다. 북한과 마찬가지로 블링컨 장관도 북미 대화 가능성은 열어놨지만, 대북 제재 이행을 통한 ‘최대 압박’을 이어갈 뜻을 내비쳤다.
북한은 당분간 관망 모드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에서 희망을 보지 못하면, 김정은 국무위원장 겸 당 총비서의 유일한 선택지는 무력 도발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1월 내내 내부 단합을 다진 북한이 미국과 중국의 앵커리지 ‘담판’을 지켜본 후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 검토가 끝나는 시점에 맞춰 본격적 대결 국면을 선언할 수 있다”며 “미국의 대화 제의는 북한이 도발할 경우 강력 제재에 나서기 위한 명분 축적용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