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외교·국방 장관이 당초 예상을 뛰어넘어 방한 첫날부터 북중(北中) 압박 행보 동참을 전방위로 압박했다. 북한을 향해 “자국민을 학대하는 권위주의 정권”이라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몰아세웠고, 중국에 대해선 “대만 민주주의와 남중국해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며 직격했다. 북중을 한데 묶어 인권과 민주주의 등의 가치를 기반으로 한 동맹세력의 대척점으로 규정했으며 한미동맹은 이에 맞서기 위한 주요 방편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바이든 행정부의 지지를 얻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재개를 모색하려던 문재인 정부의 구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일본 방문을 마친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은 17일 오산공군기지를 통해 입국했다. 블링컨 장관은 도착 직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한미 외교장관회담을 가졌다.
블링컨 장관의 회담 모두발언은 통상적 환담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축약본으로 여겨질 정도로 △중국의 인권 탄압 △북한의 비핵화 △민주주의 가치에 기반한 한미일 동맹의 중요성 등이 총망라됐다.
블링컨 장관은 “북한의 권위주의 정권은 자국민들에게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학대를 계속하고 있다”며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가치를 토대로 이를 저지하는 이들과 맞서야 한다”고 밝혔다. 북한 인권 문제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현 정부에 대한 압박인 셈이다.
정 장관은 모두발언에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확고히 정착해서 실질적 진전을 향해 나아가는 동력이 마련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블링컨 장관 발언과의 온도차가 확연했다. 블링컨 장관은 “한국과 일본 등 다른 동맹들과 함께 북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기반으로 함께 서있다”며 한미일 3각 협력을 통한 북핵 대응을 강조했다.
‘일본(15~17일)-한국(17, 18일)-알래스카(18일·미중 고위급 회담)’로 이어지는 이번 순방 목적이 ‘중국 포위망 구축’이라는 점도 숨기지 않았다. 블링컨 장관은 “중국은 강압과 공격을 통해 홍콩 경제를 체계적으로 침식하고 대만의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며, 티베트의 인권을 유린하고 남중국해에서는 인권법을 위반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미일 등 민주주의 그룹이 맞설 대상이 중국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인권과 민주주의, 법치주의를 위한 우리의 공유된 비전을 실현하고 싶다”고 방한 이유를 밝혔다. 한국이 민주주의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라면 동참하라는 압박으로, 한미동맹을 미국의 대중 전략에 있어 중요한 축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발언이다.
두 장관은 회담에서 가능한 한 이른 시일 내에 한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 위해 계속 협의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앞서 열린 한미 국방장관회담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서욱 국방부 장관을 만난 오스틴 장관은 모두발언에서 “중국과 북한의 전례 없는 위협으로 한미동맹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했다. 한미동맹의 역할을 북중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규정한 셈이다. 이어 “한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에 안보·안정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 곳으로 이에 감사드린다”며 “한미동맹은 동북아와 인도·태평양 지역, 그리고 전 세계 평화와 안보의 핵심축”이라고 강조했다.
오스틴 장관은 이어진 비공개 회담에서도 “동북아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직면한 공동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일관계 개선을 통한 한미일 협력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미 국방부 장관으로서 이례적으로 한일관계 개선을 주문한 것이다. 서 장관은 “우리의 신남방정책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큰 틀에서 다르지 않다”고 기존 우리 정부 입장을 강조했다.
이날 회담에서 미국·일본·호주·인도가 참여하는 안보연합체인 쿼드(Quad) 가입 요구가 있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한중관계 관리 필요성이 높은 한국이 당장 쿼드에 참여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고 있는 미국이 당장 쿼드에 동참할 것을 명시적으로 요구했을 개연성은 크지 않다. 다만 직접 언급이 아니더라도 미 국무·국방장관의 작심 발언은 사실상 쿼드 등 대중 포위망 참여를 요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분석이다. 블링컨 장관은 앞서 “바이든 행정부가 첫 순방지로 일본과 한국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며 “동맹은 두 나라뿐 아니라 인도·태평양 지역 그리고 세계 평화와 번영을 위한 연결고리”라고 강조한 바 있다.
한국 정부로서는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미국의 대중 포위망 구축에 보조를 맞추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11년 만에 동시 방한한 미 국무·국방장관의 방한 의미가 중국에 집중되는 것에 대한 적잖은 부담을 느끼는 분위기다. 이날 정 장관과 서 장관의 모두발언과 외교부·국방부의 보도자료에도 중국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정부가 이번 회담에서 기대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재가동을 위한 계기 마련도 쉽지 않아 보인다. 두 장관의 순방 기간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메시지가 유연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자국민을 탄압하는 정권”이라는 블링컨 장관의 발언은 북한의 반발을 부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블링컨 장관의 동북아 순방 직전 지난달 미국이 북한과의 접촉 사실을 공개하기도 했지만 당분간 밀도 있는 소통은 어렵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에 우리 정부가 기대한 남북대화 재개 동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이 이날 북한을 공개 비난한 것은 현재 검토 중인 대북정책에 북한 인권 문제가 주요 의제로 포함될 것을 시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이 인권 문제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해 왔기 때문에 향후 북미관계 개선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