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그릇에 관심이 많은지라 그 유명한 반가사유상(여담인데, 뒤태를 보시면 뒤로 넘어갈 만큼 매혹적인!)보다 먼저 중세와 근대의 문화재부터 보았다. 백자와 청자, 청화백자의 눈부신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한 가지, 눈에 깊게 드는 존재가 보였는데, 찬합이었다. 다단식으로 된 조선 후기 물품. 밥은 본디 고정된 자리에서 먹는 것이었으나 인간의 소용에 의해 이동성을 갖게 되었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모두 ‘식사’를 하지만 도시락은 인간만이 이용한다. 재미있는 건, 일본인들은 도시락을 이동형으로 이용하지 않고 식당에서 사먹는 경우도 많다. 모바일이라는 도시락의 본디 효용이 사라진 대신, 그 정취만 소비하는 방식이다.
조선시대 민속 유물 중에는 내게 아주 흥미로운 물건이 있다. 얼핏 보면 평범한 소반처럼 보이지만 머리에 이고 배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상을 이고 이동하면서 앞을 잘 볼 수 있도록 창이 뚫려 있고, 손잡이가 튼튼하게 부착되어 있다. 흔히 공고상이거나 번상이라고 부른다. 옛 사발이나 주발은 무거웠을 테니, 이고 움직이려면 아주 튼튼해야 한다. 궁중이나 여러 관청에서 쓰였다. 궁 근처에서 사는 대감이 출근하면, 점심시간에 자기 집의 사람이 가져온 밥을 먹는 경우가 있었다. 이때 공고상으로 밥을 날랐다. 아주 흥미로운 상이어서, 당대 수집가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일종의 도시락 운반집기랄까.
아마도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도시락은 양은도시락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제강점기에 출시되어 80년대까지 쓰였다. 옛 양은도시락은 요즘 웃돈이 붙어 거래된다. 추억에 빠져볼 수 있는 물건이다. 도시락으로 쓰이진 않고, 수집함이나 보관함으로 쓸모 있다고 한다. 양은도시락을 들고 다닐 때, 좀 사는 집 아이들은 일본제 코끼리표 다단식 도시락을 썼다. 남대문 도깨비 수입상가에서 파는 그 물건이 얼마나 갖고 싶었던지. 점심시간이 되면 따끈한 국까지 담긴 까만색 보온도시락을 여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반면 허술한 양은도시락도 장점이 있었으니, 석탄난로에 데워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쉬는 시간이면, 난로 위에 여러 겹으로 쌓인 도시락의 위치를 바꾸는 일이 주번의 몫이기도 했다. 밑에 너무 오래 있으면 밥이 타버렸으니까. 보통 양은도시락은 반찬통이 따로 있지 않고, 칸막이로 밥 옆에 함께 놓여 있는데 더러는 난로 위에서 반찬이 익어버리기도 했다. 김치찌개 냄새가 나기도 했다. 교실 하나에 80명이 넘는 아이들이 복작이던 시절의 추억이다.
도시락은 추억이지만, 어머니에게는 노동이었다. 아이들이 많거나, 고학년이어서 두 개씩 쌀 때는 보통 고생이셨을까. 개별적인 어머니의 맛이 한 교실에서 매일 다르게 펼쳐지는 도시락 시대의 삽화는 아름답기는 하였으나 그 또한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급식은 이런 삽화를 지워버린 새 시대의 그림이다. 누구나 동일하게, 같은 밥을 먹는다. 단,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함께 먹지 못하던 시대가 있었다. 무상급식은 그런 점에서 혁신이었다.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매우 성공적인 정책으로 평가받는다. 더구나 도시락 쌀 시간도 에너지도 없는 일하는 어머니들이 많은 이 시대에서랴. 교실에서 도시락의 풍정은 없어졌지만 그건 그대로 사라져도 훌륭한 일이었다. 대신, 누군가 편의점에서 산업형 도시락으로 한 끼를 ‘때우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기억이 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