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한 호스텔에서 어느 독일 여성이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난 뒤였다. 부고라도 들은 건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막 구입한 중고차 때문이었다. 그들은 혼다의 밴을 샀다. 장거리 운행을 하기 전, 안전을 위해 공식 서비스센터에 점검(inspection)을 맡겼다. 이 과정에서 차량 하부의 중요한 부품을 교체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금액은 무려 65만 칠레페소(당시 환율로 약 108만 원). 암담해진 그들은 수지(Suzi Santiago)를 찾았다. 수지의 사장 다니엘은 20만 페소(약 33만 원)로 해결 가능한 정비소를 소개해 주었다. 그녀의 눈물은 일단 해프닝으로 끝났다.
수지는 칠레에 연고를 둔 여행자 대상의 중고차 거래 업체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아는 거래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차량을 다량 보유하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시운전도 해볼 수 없다. 보유한 차량도 있어도 선택권이 적다. 이 회사만 믿고 있다가는 칠레에 뼈를 묻어야 할지도 모른다. 한 여행자의 조언이 지금도 생생하다. “수지는 너를 위해 차를 구해주지 않아. 그저 도와줄 뿐.”
‘중고차를 구입하려면 발품이 생명’이라는 말은 이곳에서도 정석이다. 여행을 시작할 시점부터 최소 1~2개월 전에 차량 구입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3개월 전부터 시세를 파악하거나 정보 수집 차원에서 온라인을 두리번거려야 한다. 밤낮으로 여러 페이스북 커뮤니티를 들락날락하며, 여행자가 직거래로 내놓은 중고차를 스스로 찾는 게 최선이다.
우리가 수지를 만난 건 직접 사겠다고 약속한 차량이 수지에 맡겨지면서다. 차주는 우리의 칠레 입국과 하루 차이로 귀국할 일이 생겼고, 그 사이 수지는 이 차량의 대행사가 됐다. 우리 입장에선 수지에 옷깃만 스쳤을 뿐이건만, 5%의 심기 불편한 수수료가 붙었다. 그러나 수지가 진정한 빛을 발하는 건 외국인이 칠레의 차량을 소유하기까지 골치 아픈 서류를 대행해 주는 업무다.
구매 절차가 끝나면 어떤 경로로 남미를 여행하는 게 좋을지, 어느 국경을 넘어야 문제가 없는지 등 그들만의 노하우를 ‘풀 서비스’란 항목으로 추가된 금액과 맞바꾼다. 구입한 차량을 수지에서 구미에 맞게 업그레이드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SOS 콜센터 기능이 반갑다. 타국에서 어린 아이가 될 수밖에 없는 여행자는 늘 문제를 달고 사는 법. 원격으로 빠른 대응책을 내놓기도 하고, 때론 스페인어 통역가로 활약한다. 단순한 거래상이라기보다 차량 구매 후 여행을 돕는 든든한 보디가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맘에 드는 차량이 나올 때마다 여러 판매자에게 문의하는 문어발식 접선을 시도했다. 판매자가 팔고 싶어하는 지역과 날짜가 워낙 다양하기에, 여행 경로를 재점검하는 수고가 따랐다. 당시 호주에서 칠레 산티아고행 비행은 결정한 상태였다. 판매자의 여행이 종결되는 에콰도르로 날아가 살 것인가, 또는 비행 날짜를 조정해 판매자가 팔고 싶어 하는 시기에 맞출 것인가 등 여러 가능성을 두고 고민하는 사이, 직거래를 통해 산티아고에서 차량을 팔겠다는 독일인과 접촉했다.
2009년식 산타페 사륜구동 차량으로 루프톱 텐트가 장착되어 있어 차박이 용이했다. 수지를 통해 차에 별 문제가 없음도 확인했다. 판매자와 수지에 모든 비용을 정산했다. 그러나 문제가 단단히 있었다. 장거리를 뛰기 전 테스트 겸 산티아고 외곽의 오프로드를 신나게 달렸다. 아스팔트 도로에선 안 나던 이상야릇한 소리가 들린다. 총 점검을 맡겼다. 수리비는 한국 돈으로 약 170만 원. 숙소에서 울던 독일인의 처지가 바로 나였다. 아니 두세 배 더 울어야 했다.
칠레에서 중고차를 사는 건 직거래로 집을 사는 것과 같다. 원하는 조건으로 차를 찾고, 주행거리 및 이전 수리 관련 서류를 점검한다. 우리가 완벽하게 놓친 건 수지가 ‘문제없음’이라 한 게 정비소에서 점검을 마쳤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거였다. 그냥 직접 운전해 보고 감으로 판단한 것 뿐이다.
집을 살 때 한 번 살아보고 잔금을 치르겠다고 할 수 없듯이, 중고차도 하루쯤 몰아보고 구입할 기회를 주는 매매상은 없었다. 당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약 10~15% 정도의 계약금을 걸고 수리 업체에 총 점검을 맡긴 뒤 나머지 금액을 협의하겠다고 의사 표시를 해야 했다. 적어도 행여나 필요할 수리에 관해 미리 논의할 필요는 있었다. 우리는 거래 업체만 믿고 꼭 점검해야 할 사항을 가벼이 넘겼다. 사고 봤더니 문제가 많은 집, 그게 우리집이었다.
이 차를 누가 선점할까 봐 마음이 조급했던 게 사실이다. 돌이켜보니 바보 같은 행위였지만, 당시에는 차를 사는 데만 급급했다. 끙끙대봤자 속만 더 상할 뿐, 우린 이미 강을 건너지 않았던가. 안전이 최우선이다, 팔 때 그만큼 웃돈을 얹어 팔자며 마음을 달랬다. 앞으로 여행할 당신은 부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길 바란다. 다음 편은 차량 구입 후 소유주가 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과, 자기 차량 여행 시 점검 사항을 싣는다.
중고차 구매 정보는 여행자가 많이 묵는 숙소에서, 남미 여행에 일가견이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이 커뮤니티에 동참해 검색 레이더를 켤 것. 링크를 타고, 또 타고 들어가면 쏟아지는 중고차 정보의 신세계를 경험하기도 한다.
▦오버랜더 칠레 바이 앤드 셀
중고차와 오토바이 직거래가 이뤄지는 곳. 사진과 함께 차량 사양이 명시되고, 어디에서 언제 픽업할 수 있는지 등 판매자의 똑 부러진 정보가 나열돼 있다.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판매자와 눈치 게임 시작! 협상은 물론 ‘알아서’ 해야 한다.
▦오버랜딩 바이 앤드 셀 아메리카
7만5,000명의 회원 수를 보유한, 여행 관련 중고 물품 거래 플랫폼. 중고차나 오토바이 외에 각종 집기와 부품 거래도 이뤄지는, 여행자의 글로벌 ‘당근 마켓(지역 기반의 중고 거래앱)’이다. 카메라나 서핑 보드, 캠핑 의자 등 현지에서 필요한 물건이 생겼다면 여기부터 뒤져 보길.
▦팬아메리칸 트래블러 어소시에이션
남북 아메리카를 종단하는 루트를 ‘팬아메리칸 하이웨이’라 부른다. 로드 트립을 꿈꾸는 이들에게 종결판 같은 존재. 중고차 거래 정보 외 여행자끼리의 단합이나 수다도 많다. 구입할 차량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여행의 동기는 활활 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