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와중에 "핵무기 늘리겠다"… 유럽 떠나 고삐 풀린 英

입력
2021.03.18 00:10
외교·안보정책 보고서 통해 핵 증강 계획 공개
中견제 명분… "핵비확산 포기, 이란이 웃을 것"

영국이 핵무기 보유고를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중국을 최대 안보 위협 국가로 지목하면서다. 유럽연합(EU)과의 완전 결별이 독자 군사 행보로 이어지는 형국이다.

영국 정부는 16일(현지시간) 펴낸 114쪽 분량의 외교ㆍ안보 정책 보고서 ‘경쟁 시대의 글로벌 영국’을 통해 핵전력 증강 계획을 공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은 진화하는 세계의 안보 위협에 맞서기 위해 핵탄두 보유 상한선을 10년 안에 기존 180개에서 260개로 40% 넘게 늘린다는 방침이다. 2020년대 중반까지 핵탄두 보유 한도를 225개에서 180개로 줄이겠다는 2010년 약속을 뒤집은 것이다.

핵심 명분은 중국 견제다. 보고서는 중국을 “국가 단위로는 가장 큰 위협”이라고 규정했다. 러시아도 안보 위협으로 함께 꼽혔지만, 보고서 등장 빈도를 보면 중국(29회)이 러시아(14회)의 두 배가 넘는다. 이날 기자들을 만난 도미닉 라브 외무장관은 핵 증강과 관련, “적대국이 가하는 최악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궁극적 보험 정책”이라는 식으로 설명했다고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가 전했다.

영국ㆍ중국 간 갈등 수위는 최근 상당히 올라간 상태다. 최전선은 인권이고, 영국이 더 공세적이다. 자국 BBC방송을 통해 신장위구르 지역 여성들이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는가 하면, 중국의 탄압을 피하려는 홍콩인의 영국 이민을 전폭 허용하기도 했다. 보고서는 중국을 두고 “점점 강력해지며 우리 삶의 많은 측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더불어 “무역 등에서 중국과 긍정적 관계를 추구하면서도 우리의 국가 안보와 가치를 보호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시선은 곱지 않다. “군비 경쟁 추구가 아니라 최소한의 억제력 보유를 원한다”고 라브 장관이 선을 그었지만,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넘어 황당하다는 반응까지 나온다. “보리스 존슨 정부의 핵탄두 확대 선언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는 WP 논평이 단적이다. 국제운동단체 ‘핵 군축 캠페인’의 케이트 허드슨 사무총장은 이날 성명에서 “지금은 핵 군비 경쟁을 벌일 때가 아니다. 세계가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이나 기후위기와 싸우고 있는 상황에 영국 정부가 핵무기 증강을 결정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전통적인 핵 확산 방지 주도 국가인 데다 현재 이란을 상대로 핵 개발 포기를 종용하고 있는 ‘이란 핵합의’(JCPOAㆍ포괄적 공동행동계획) 당사국 중 하나라는 영국의 위상과도 이번 핵 증강 선언은 걸맞지 않는다는 게 중론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영국 외무장관의 핵 프로그램 강연은 향후 이란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올해 마침내 EU를 완전히 떠난 영국이 향후 10년간 추진할 외교와 안보 정책 방향이 담긴 이 보고서에는 앞으로 외교 정책 중심축을 인도ㆍ태평양 지역에 두겠다는 구상도 담겼다. BBC는 “지금껏 EU 회원국 또는 미국과의 관계로 정의돼 왔던 영국의 대외 전략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계기로 전부 바뀌었다”고 했다.

권경성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