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남·대외 정책을 총괄하는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16일 한미연합군사연습(한미훈련) 실시를 맹비난하며 남북 대화·교류 단절을 경고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에 대해서도 “시작부터 잠 설칠 일 만들지 말라”고 압박했다. 표면적으론 대남 비난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지만, 미국 국무·국방장관 방한을 하루 앞두고 첫 대미 입장을 표출했다는 점에서 미국을 겨냥한 담화로 봐야 한다.
김 부부장은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을 비롯한 대내 매체를 통해 ‘3년 전의 봄날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제목의 담화를 공개했다. 올해 1월 8차 당대회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 겸 당 총비서가 요구한 한미훈련 중단이 수용되지 않은 데 대한 불만 표시다. 김 부부장은 “(훈련에) 50명이 참가하든 100명이 참가하든, 형식이 변이되든, 동족을 겨냥한 침략 전쟁 연습이라는 본질과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며 “전쟁 연습과 대화, 적대와 협력은 절대로 양립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대미 메시지는 담화 말미에 짧게 언급됐다. 김 부부장은 “대양 건너에서 우리 땅에 화약내를 풍기고 싶어 몸살을 앓는 미국 새 행정부에도 한마디 충고한다”며 “앞으로 4년간 발편잠을 자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면 시작부터 멋 없이 잠 설칠 일거리를 만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간 미국의 대북 접촉 시도에 ‘무대응’으로 일관해 온 북한이 처음 바이든 행정부를 공식 언급한 것이다. 대남 비난에 “미친개” “판별 능력마저 상실한 떼떼(말더듬이)” 등 원색적 표현을 동원한 것과 달리, 비교적 정제된 언어를 사용해 수위를 조절했다.
김 부부장의 담화가 나온 ‘시점’ 자체가 메시지다. 담화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이 일본에 도착한 15일 작성돼 방한 하루 전에 공개됐다. 미국의 대북 정책 검토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고 한미 외교·국방장관 2+2회의를 앞둔 상황에서 '북한의 무서움을 잊지 말라'고 경고를 보낸 것이다. 왕선택 여시재 정책위원은 “미국 대북 정책 수립 과정에서 전향적 접근을 유도하고 한미 모두에 심리적 압박을 가하려는 목적”이라고 분석했다.
김 부부장은 한국엔 ‘말폭탄’과 함께 관계 단절 수준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했다. “남조선당국은 또다시 ‘전쟁의 3월’을 선택했다”면서 통일부의 카운터파트 격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와 금강산 관광 업무를 담당하는 금강산국제관광국의 해체를 최고 수뇌부에 보고한 상태라고 밝혔다. 남북군사분야합의서를 “씨원스럽게 파기해버리는” 대책을 검토 중이라고도 했다. “임기 말기에 들어선 남조선 당국의 앞길이 무척 고통스럽고 편안치 못하게 될 것”이라는 엄포도 덧붙였다.
다만 “앞으로 남조선 당국의 태도와 행동을 주시할 것”이라는 단서를 달아 여지를 남겼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6월에도 김 위원장이 대남 군사행동 계획을 돌연 보류한 적이 있었다”면서 “금강산국제관광국을 실제 해체하는지, 동계 훈련 중인 북한군의 특이 동향이 있는지 등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행동에 나선다면, 이번 담화는 한반도 긴장 고조의 책임을 한미에 전가하기 위한 ‘명분 쌓기용’으로 볼 수 있다.
정부는 김 부부장 담화에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북한과 대화를 지속하겠다는 원칙적 입장을 유지했다. 서욱 국방부 장관은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방어적, 연례적 성격의 훈련에 대한 비난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우리 군은 어떠한 상황이라도 대비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이 제시한 여러 조치를 예단하기보다 어떤 경우에도 대화, 협력을 계속 시도해나가겠다”며 “이번 미 국무ㆍ국방장관 방한을 계기로 대북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