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국가는 경제, 교육, 환경, 보건 등 모든 영역에서 정책의 진공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정부는 다양한 정치적 요구를 통합하고 우선 순위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면서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정치 지도자를 바꾸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구세주 콤플렉스’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혼란과 갈등은 대부분 정치 지도자가 아닌 제도의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현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대부분의 정치 체제와 사회 제도는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던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대부분의 국가는 다양성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기존의 틀 속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서라도 사회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과거의 성장을 이어가야 한다는 히틀러나 스탈린 신봉자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전체주의 기반의 거대한 정부 그리고 능률적인 정부에 대한 기대는 전체주의 사회의 권력 투쟁, 부패, 책임 회피에 대한 실망감으로 바뀔 것이다.
다양한 정치적 요구를 수용하여 성장의 토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건설적인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첨예한 갈등을 야기하는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서 찬반 투표를 진행하기보다는 여러 개의 사안을 두고 유권자들에게 무엇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를 묻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구성원들의 이중적 태도와 다양한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기인하는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을 포기하기 위해 소득세의 인상은 동의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또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소수 주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미국, 영국, 일본의 일부 기업들이 도입하여 운용하고 있는 누적투표제를 활용할 수도 있다. 각 유권자에게 후보자의 수와 같은 수의 표를 행사하도록 하고 유권자는 한 후보자에게 표를 몰아줄 수도 있고 몇 명의 후보자에게 표를 나누어 줄 수도 있게 함으로써 유권자들은 선택의 우선 순위를 표현할 수 있다. 물론 복잡한 절차로 인한 비용 증가와 부정 투표에 대한 시비가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진화하는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여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비용을 억제하면서 유권자들의 다양한 정치적 욕구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일지 모른다. 이제 국가는 사안별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수많은 집단의 합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플랫폼 기반의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보수, 진보 등 정치적 관점에 따라 다수의 여론이 쉽게 형성되던 시대와는 달리 사안별로 다양한 정치적 수요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정당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소수 이익집단의 이합집산이 용이한 레고 형태의 조립식 정당, 즉 상시적인 결합과 해체가 가능한 정당을 기반으로 하는 플랫폼식 정당 제도를 통해서 다양한 정치적 욕구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형선고와 같은 중대한 사안도 추첨에 의해 구성된 배심원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조립식 정당이 발의한 부동산과 관련된 정책의 입법도 추첨에 의해 구성된 입법 기관에 의해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