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이 절에 불을 질렀을 때

입력
2021.03.16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전북 정읍 내장산 복판에 자리잡은 사찰, 내장사는 지난 주말 각지에서 온 수십 명의 불자들로 북적였다. 상춘 인파 정도로 여겨졌던 이들은 마주보고 둘러앉는 대신 대웅전 터를 향해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었다. 열흘 전만 해도 웅장한 자태를 뽐내던 대웅전이 승려 K가 놓은 불에 전소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이다. 이들은 까맣게 탄 기둥과 깨진 기왓조각이 나뒹구는 곳을 향해 108배 참회법회를 가졌다. 법회에 참석한 선운사 주지는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앞으로 100일 동안 본ㆍ말사 사부대중이 참회기도를 이어가겠다”고 했다. 참회기도 기간 문화재구역 입장료를 받지 않겠다고도 했다. 내장사는 고창 선운사의 말사다.

선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24교구 본사다. 그러나 이 같은 공식 타이틀보다는 전국의 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찰 중 하나로 유명하다.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그 작품과 주변 자연이 어우러져 울림을 주면서 종교와 무관하게 많은 이들이 연중 찾는 곳이다. 선운사 주지가 ‘대한불교 조계종 24교구 본사 주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숙이고 숙이는 일이 그의 업이지만, 그가 국민을 향해 이처럼 공개적으로 엎드렸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출가 수행자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잃고 자기 안의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데 실패한 K에 대한 질책, 승가공동체 대표자로서의 과오가 섞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말이 있지만, 승려 K는 떠나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불을 질렀다. 경칩이기도 했던 5일 해질녘 내장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 조사에서 K가 사찰 관계자들과 마찰이 있었고, 홧김에 술을 마시고 저지른 일이라고 진술한 대목에서 그 ‘마찰’이 대웅전 전소 사건의 직접적 발단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자신을 서운하게 했던 절을 뒤로하고 조용히 떠날 마음도 없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속세의 싸구려 감정에 휘말리면서 일을 그르쳤다.

그를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대웅전 전소 사건을 접하면서 따스했던 경칩날 오후 짧은 시간 번뇌했을 K를 떠올린다.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던 그가, 절이 싫었다면 그 절을 떠났으면 그만이었을 것을, 그는 왜 불을 질렀을까. 절에 불을 놓기 전까지 번민했을 승려 K에게 감정이입하면 다시 많을 이들이 떠오른다. 싫어도 떠날 수 없고, 떠날 곳 없는,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인이다.

최근 잇따른 부동산 투기 의혹에 분노를 표하는 사람들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무수한 단체들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 본사와 지역본부로 달려가 시위를 벌였다. 내 집 마련 꿈을 잃은 청년단체들은 LH와 정부를 규탄하는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LH 해체와 정부의 공직자 전수조사 요구, 그리고 투기재산 몰수와 투기이익 환수 등의 후속 조치를 그들은 요구하고 있다.

단순한 시위로 보이지 않는다. 떠날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함께 평생 일군 땅을 버리고 갈 수 없는 이들의 생존 몸부림이다. 떠날 수 없으니, 떠날 곳이 없으니, ‘절’이 변해 달라는 외침이다. 모두가 예의주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를 서운하게 한다면 들고 있는 촛불이 ‘절’에 옮겨 붙을지 모른다.




정민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