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억 체납한 병원장… 숨겨둔 코인 압류하자 곧바로 '자진 납세'

입력
2021.03.1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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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가상자산 은닉한 체납자 2,416명 대상 366억원 환수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출금·송금 막고 강제 처분 예고


서울 강남구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A씨는 소득세를 비롯해 27억 원의 세금을 내지 않아 국세청이 관리하는 체납자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그동안 고급 아파트에 사는 등 호화 생활을 하는데도 막상 징수할 수 있는 자산이 확인되지 않아 국세청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터였다. A씨가 병원에서 벌어들인 돈을 국세청의 손길이 닿지 않는 가상자산으로 바꿔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국세청이 가상자산 강제 징수에 나설 수 있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국세청이 39억 원 상당의 A씨 가상자산을 압류하자 그는 곧바로 세금을 전액 납부했다. 압류 당시인 1월 기준 가상자산 가치는 비트코인 1개당 약 4,000만 원이었는데, A씨는 가상자산 가격이 이보다 더 오를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판례로 거래소 출금 못하게 막아 세금 환수

국세청은 15일 국세 체납자 가운데 가상자산을 보유한 2,416명을 찾아내 총 366억 원을 현금으로 징수하거나 채권으로 확보했다고 밝혔다. 다수의 체납자들이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현금이나 부동산, 주식 같은 실물 자산 대신 가상자산을 보유하고 있었음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국세청은 체납자들이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보유한 자산을 출금할 수 없도록 막아 세금을 환수했다. 이 방식이 가능했던 것은 그동안의 판례 덕분이다. 대법원은 지난 2018년 5월 ‘가상자산이 몰수의 대상인 재산적 가치가 있는 무형재산’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이에 앞서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울산지방법원은 가상자산 △출급청구채권(전자지갑에서 꺼낼 권리) △전송·매각에 대한 이행청구권 △반환청구권 △지급청구권을 가압류 대상으로 인정했다.

국세청은 이를 근거로 올해 초 빗썸, 업비트 등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로부터 체납액 1,000만 원이 넘는 체납자의 가상자산 보유 현황을 받고, 압류 조치에 나섰다. 거래소를 통해 가상자산을 압류하고, 강제 처분을 예고하니 가상자산 가치가 더 올라갈 것으로 본 체납자들이 알아서 세금을 내기 시작했다.

이처럼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자산은 앞으로 범죄 수익을 숨겨 놓는 창구로 활용되지못하게 됐다. 특정금융정보법이 25일 시행되는 등 가상자산이 서서히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면서, 가상자산을 통한 세금 회피는 더욱 힘들어질 전망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특정금융정보법에 가상자산이 포함되는 25일부터는 가상자산거래소에도 불법재산 의심 거래, 고액 현금거래 등을 보고할 의무가 생겨 이 같은 방식의 체납 징수 근거는 더 명확해진다"고 말했다.



가상자산 많이 올라… 징수 가능성 높아져

최근 가상자산 가치가 많이 오른 만큼 체납자들이 세금을 내야 할 유인은 더 커졌다. 2018년 말 기준 1개당 427만 원이던 비트코인 가치는 최근 7,000만 원을 넘기도 했다. 국세청은 압류한 가상자산을 매각해 세금을 징수할 방침인데, 만약 이후에도 가치가 더 오를 것으로 판단한다면 A씨처럼 다른 방법으로 돈을 조달하는 방법이 유리할 수 있다.

일부는 국세청과 협의해 이미 가치가 오른 가상자산을 현금화해 세금으로 내기도 했다. 경기도에 있는 부동산을 48억 원에 매각한 뒤 양도소득세 12억 원을 체납한 B씨는 국세청의 압류가 진행되자 보유한 가상자산 12억 원어치를 현금화해 세금으로 냈다.

정철우 국세청 징세법무국장은 "가상자산의 가격 동향을 고려해 적정한 시점에 현금화 할 것"이라며 "신종 수법이 있다면 신속하게 대응해 고액체납자의 은닉 재산을 끝까지 추적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 = 박세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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