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처벌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기 직전, 임신 34주의 산모에게 낙태 시술을 해 준 산부인과 의사의 업무상촉탁낙태죄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다만, 낙태 수술 도중 살아 있는 상태로 태어난 아기를 고의로 숨지도록 한 살인 혐의는 유죄로 인정돼 해당 의사에겐 실형이 확정됐다.
대법원 1부(주심 이기택 대법관)는 살인과 업무상촉탁낙태, 사체손괴 등 혐의로 기소된 산부인과 전문의 윤모씨에게 징역 3년 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4일 밝혔다.
서울의 한 산부인과 의사인 윤씨는 2019년 3월 “성폭행을 당해 임신했다”면서 병원을 찾은 산모 A씨와 그의 모친 B씨의 부탁에 따라 불법 낙태 시술을 하고, 이 과정에서 태어난 신생아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A씨는 임신 34주의 상태였다. 윤씨는 제왕절개 방식으로 A씨 몸에서 꺼낸 태아가 울음을 터뜨리자, 4리터 크기 양동이에 받아둔 물에 담가 아기를 사망케 했다. 신생아 사체는 수술실 냉장고에 넣어 냉동시킨 뒤, 의료폐기물 수거업체에 넘긴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 수사에 대비, 이미 사산한 태아를 꺼내는 수술을 한 것처럼 진료기록부를 조작하기도 했다.
재판 과정에서 최대 쟁점은 사실상 위헌 결정이 내려진 업무상촉탁낙태죄를 윤씨에게 물을 수 있느냐였다. 헌재는 윤씨의 낙태 시술 3주 후인 2019년 4월 11일, 형법상 낙태죄와 업무상촉탁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법불합치란 위헌 판단과 같지만, 당장 해당 조항을 폐지할 경우 사회적 혼란이나 부작용이 생길 것을 막기 위해 국회의 법 개정 전까지만 법률 효력을 유지시키는 결정이다. 윤씨 측은 “헌재의 업무상촉탁낙태죄 위헌 판단 이후 기소됐으므로 무죄가 선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심은 윤씨의 살인죄뿐 아니라, 업무상촉탁낙태 혐의에도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3년 6월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헌재가 정한 낙태죄 관련 법 개정 시한(2020년 12월 31일)이 도래하지 않았고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하면서도 여성의 자기결정권 행사가 보장되는 시기(임신 22주 내외)가 훨씬 지난 태아를 낙태시킨 사실 등을 그 사유로 제시했다.
그러나 2심은 1심과 달리, 업무상촉탁낙태죄엔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헌법불합치 결정 즉시, 그 조항은 헌법재판소법 규정대로 소급해서 효력을 상실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법 개정 시한까지 개선 입법이 이뤄지지 않은 경우는 물론, 아직 개정 시한이 남아 있는 경우에도 동일하게 판단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법 개정 전까지 낙태죄 처벌 조항을 유지하라’는 헌재 결정에 대해서도 “위헌인 법률을 잠정 적용해서라도 기존 질서를 유지하라는 것과 다름 없어, 헌법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다만 살인 등 나머지 혐의들에 대한 유죄 선고는 1심과 같았고, 형량도 그대로 유지했다. 대법원은 “원심 판단에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 효력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며 윤씨와 검사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