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컬리 '블랙리스트'

입력
2021.03.14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근로자의 취업을 방해할 목적으로 비밀 기호, 명부를 작성ㆍ사용ㆍ통신하는 행위’. 근로기준법(40조)이 규정한 ‘블랙리스트’ 범죄다. 블랙리스트를 활용해 취업을 금지할 경우 5,000만 원 이하의 벌금, 또는 5년 이하 징역이다.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32조) 정신에 반하는 범죄다.

□ 국내에서 블랙리스트가 처음으로 문제가 된 건 1970년대 대표적인 노동운동 사업장인 동일방직 사건이다. 여성노동자들이 주도한 민주적 노조 운영에 반감을 품은 사측과 남성 관리자들이 여성노동자들에게 인분(人糞)을 투척한 사건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동일방직의 상급단체 섬유노조가 1978년 이 회사에서 부당 해고된 124명의 명단을 ‘업무 참조 건’ 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방직ㆍ피복 공장 관리자들에게 돌린 게 시초다. 이후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노동현장으로부터 불순분자를 추방하겠다’며 정보기관을 활용해 공공연히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배포했다. 민주화 직전인 1986년 무렵 블랙리스트에 오른 명단은 1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 이른바 혁신을 표방한 플랫폼기업이 최근까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특정한 일용직노동자들에게 일감을 주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새벽 배송으로 유명한 마켓컬리의 운영사인 컬리는 취업 불가 근로자 500여 명의 이름과 생년월일, 전화번호 등을 엑셀파일로 작성하고 이를 5개 이상 협력업체에 통보해 취업을 방해한 혐의로 최근 고용노동부에 고발됐다. 컬리 측은 일용직 관리 차원에서 명단을 작성했고 다른 물류업체와는 이를 공유하지 않아 적법하다고 주장한다. 컬리를 고발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측은 ‘취업 방해’자체가 노동법 위반이며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막으려는 속셈이라고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 쿠팡에 이어 미국 증시에 상장 추진 계획을 밝힌 컬리 측은 블랙리스트 의혹 확산에 당황하는 분위기다.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는 플랫폼 기업들은 혁신을 통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근절되지 않는 산업재해(쿠팡), 불법 파견(타다) 논란 등 노동감수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전근대적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을 받고 있는 컬리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왕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