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하지도, 불가능하지도 않은 낙태

입력
2021.03.14 10:00
25면

편집자주

우리는 중남미에 대해 무엇을 상상하는가. 빈곤, 마약, 폭력, 열정, 체 게바라? 인구 6억2,500만 명. 다양한 언어와 인종과 문화가 33개 이상의 나라에서 각자 모습으로 공존하는 곳. 10여 년 전에는 한국도 베네수엘라 모델을 따라야 한다더니 요즘엔 베네수엘라 꼴 날까 봐 걱정들이다. 민원정 칠레 가톨릭대 교수가 중남미의 제대로 된 꼴을 보여 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레베카(가명)는 결혼도 하지 않은 열아홉 살 된 딸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차마 불법 낙태를 권할 수 없었다. 아이의 아버지를 찾을 수 없던 탓에 흑인 혼혈인 아이는 어머니의 이탈리아 성을 따랐다.

2020년 12월 아르헨티나에서 14주 이내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중남미 곳곳에서 낙태 논란이 뜨겁다. 낙태를 반대하는 수천 명이 의회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낙태를 지지하던 그룹 '마레아 베르데'(Marea Verde, 직역하면 초록 물결)는 환호성을 울렸다. 마레아 베르데는 여성은 자신이 엄마가 될 의지와 때를 두려움 없이 선택할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음을 주장하며 낙태 차별화를 옹호하는 페미니스트 운동이다.

낙태법이 통과되기 이전의 아르헨티나, 그리고 멕시코와 칠레에서 낙태법이 일부 개정됐지만, 현실적으로 합법적 낙태는 쉽지 않다. 페루의 경우 어머니의 생명이나 건강에 위협이 되는 경우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합법적인 치료용 낙태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서 페루에서는 매년 3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불법 낙태를 하는 등 비밀 낙태가 성행하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2019년까지 수도인 멕시코시티에서만 합법적인 낙태가 가능했다. 남한 면적의 20배, 총면적 1,972,550㎢인 멕시코의 여성들은 낙태를 원한다면, 그리고 경제적 여건이 허락한다면,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 멕시코시티로 가야 했고 오늘날에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현재 중남미에서는 미국령 푸에르토리코, 쿠바, 가이아나, 프랑스령 가이아나, 우루과이만이 임신 초기에 조건 없는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일부 중남미 국가에서는 여성이 임신 중지를 할 수 있는 세 가지 조건, 즉 산모 건강이 위험하다고 판단될 때, 태아의 상태가 치명적일 때, 강간의 경우 낙태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증명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 병원과 의사들의 낙태 절차 거부 등으로 그나마 합법적인 낙태가 가능한 임신 초기는 훌쩍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성폭행으로 임신한 여성이 성폭행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고 불법 낙태죄로 감옥에 가는 실정이다.

원치 않는 임신에는 미흡한 성교육도 한몫한다. 신생아 열 명 중 일곱 명이 비혼 자녀일 정도로 중남미 전반에 걸쳐 혼외자의 비율도 높다. 칠레의 경우 아버지가 친자임을 인정하면 교육비와 식비를 지급할 의무가 있지만, 일정한 직업이 없는 중하류층에게는 지급 의무를 강제할 방도가 없다. 가난한 소녀와 여성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불법 낙태를 택하기도 하지만, 그나마 그 비용도 마련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홀로 아이를 기르며 가난을 대물림하게 된다. "부자들은 낙태를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죽는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칠레 첫 여성 대통령이었던 미첼 바첼렛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명, 이혼 후 남자 친구와의 사이에서 한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이혼녀에 비혼 자녀를 뒀다는 사실이 그녀의 정치행로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도 없었다. 보수적인 가톨릭교회에서도 낙태는 거부하되 사회가 낙태를 겪은 사람을 처벌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낙태를 허용한다 해도 아이의 아버지가 책임을 회피하고, 산모 건강의 위험성과 성폭행을 증명하지 못하고, 병원에 갈 돈이 없어 아이를 낳아야 하는 수많은 중남미여성들에게 낙태는 낙태냐, 임신 중단이냐의 문제 이전에 생존의 문제다.



민원정 칠레 가톨릭대 교수?서울대 규장각펠로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