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 온', 권력 무력화하는 기발한 장치

입력
2021.03.11 22:00
27면


"육상부, 김우식, 오미주, 니 약점 세 개, 내가 이 중에서 뭘 건드렸을 것 같애?"라는 아버지 기정도의 말에, 기선겸은 "아버지가 틀렸어요. 그 사람 제 약점 아니고 강점이에요. 그러니까 건드려 보세요"라고 대답한다. 최근에 종영한 jtbc 드라마 '런 온'에 나오는 대사다. 밤을 새고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이 드라마에는 미덕이 많았지만, 아마도 많은 시청자가 주목하지 않았을 극중 기정도(박영규)를 중심으로 이 드라마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런 온'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새로움에 반해, 기정도의 캐릭터는 부와 권력을 가진 존재로 지겨울 만큼 익숙한 캐릭터다. 그에게 사람을 시켜 자식을 미행하거나, 돈 봉투로 사람을 부리거나, 자식이 원치 않는 정략결혼을 시키는 일 정도는 당연한 일상이다. 그의 캐릭터에 한국 멜로 혹은 가족 드라마에 등장해 온 유사한 수백 명의 캐릭터가 겹쳐 보일 만큼 기정도는 매우 전형적인 인물이다.

새로운 캐릭터들로 가득한 이 드라마에서 기정도의 존재는 시청자들을 의아하게 하거나 드라마의 한계로 지적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배우 박영규가 연기하는 기정도의 존재는 이 드라마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천재적인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이전의 드라마들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캐릭터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정도라는 낡은 캐릭터는 아무리 권력을 휘둘러도 더 이상 무섭고 위압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이상하고 짜증나는 우스운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권력을 대표하는 기정도는 새로운 변화된 세대를 보여주는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무력화된다.

이 지점에서 난 희망을 봤다. 우리는 늘 힘과 권력을 가진 이들을 향해 왜 세상의 변화에 따라 변하지 않느냐고 비판하지만,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그냥 버리고 변할 리가 없다. 하지만 수많은 기정도와 관계 맺고 있는 우리 모두가 변한다면 그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로 떨어진 과거인처럼 이 배치 속에서 우스워지고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우리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반대로 강점으로 만들어 버리면 기정도들은 더 이상 힘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처럼 약점일 수도 있는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경우에 따라선 그것이 우리의 강점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태도와 생각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시간도 많이 걸리겠지만, 나머지 우리들이 변화한다면 결국 세상은 변할 것이다.

드라마 '런 온'은 멜로의 장르적 클리셰들을 영리하게 비틀며 계승한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멜로드라마적 관습을 성별을 바꾸어 설정함으로써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재벌 2세 남자와 가난한 여자 커플의 성별을 역전한다거나, 관계에서 똑똑하고 주체적인 인물로 남성이 아니라 여성으로 설정하거나, 결혼이 답이 아닌 새로운 관계를 제시하는 등, '런 온'은 그것이 장르이든 세상이든 주어진 모든 것을 한 번에 뒤바꾸는 변화란 가능하지 않은 현실을 인정한다. 주어진 것 자체는 못 바꾸더라도 우리가 변화하면서 그것과의 배치를 바꾸어버린다면 세상이 변할 수 있음을 '런 온'은 보여줬다. 소소하지만 가슴 뜨거운 희망을 꿈꾸게 하는 새로운 색깔의 멜로드라마 '런 온'의 등장에 박수를 보낸다.



이지영 세종대 교양학부 교수·'BTS예술혁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