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는 성경에서 예수를 팔아 넘긴 인물로 그려진다. 때문에 유다는 오랫동안 배신자의 대명사로 불렸다. 유다는 정말 예수를 배신한 것일까? 최근 출간된 아모스 오즈의 장편 소설 ‘유다’는 이 오랜 논쟁을 문학적 질문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2018년 세상을 떠난 오즈의 생전 마지막 작품으로, 히브리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던 오즈가 평생 골몰한 주제를 집대성한 역작이다.
소설의 배경은 1959년 말에서 1960년대 초 겨울, 스물다섯 살의 대학원생 슈무엘은 학교를 그만두고 일자리를 찾던 중 “인문학을 공부하는 미혼 남학생, 역사를 잘 알고 있으며,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는 세심한 대화가 가능한 분”을 찾는다는 공고를 발견한다. 공고를 보고 찾아간 곳에서 슈무엘은 장애가 있고 학식이 깊은 일흔 살 남성 발드와 마흔다섯 살의 아름답고 냉담한 여인 아탈리야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슈무엘이 할 일은 매일 저녁 5시부터 밤 10시까지 서재에 앉아 발드와 대화를 하는 것이다.
소설은 슈무엘과 발드가 나누는 논쟁적 토론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이들의 대화는 각각 노인과 청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대표하며 팽팽하게 이뤄진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답하고자 하는 하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배신자인가?"
오즈는 역사 속 두 명의 배신자를 소환한다. 예수를 팔아 넘긴 제자 가룟 유다와, 이스라엘 건국을 극구 반대하고 아랍과의 공존을 주장했던 지식인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이다.
모두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혔지만, 실은 '한순간도 예수를 떠나지 않았고 그를 부인하지 않았던 유일한 기독교인'이었던 유다와, '아랍인과 유대인이 함께 사는 공동체를 꿈꾼 사람'이었던 아브라바넬. 오즈는 2,000년의 시간 차를 둔 이 두 인물을 연결시키며 배신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한 방대한 역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묵직한 분량의 소설이지만 이러한 배경지식이 독자의 발목을 붙잡지는 않는다. 종교적 철학적 정치적 주제에 골몰하는 동시에 슈무엘과 아탈리야의 사랑이 또 하나의 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아탈리야의 사랑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슈무엘과 그를 밀어내는 아탈리야의 관계는 이야기에 시종일관 긴장을 불어넣는다. 여기에 아탈리야와 발드 집안에 얽힌 비극적 진실이 차차 드러나면서 소설은 거침없이 전개된다.
오즈가 이 같은 배신자라는 주제에 천착한 것은 오즈 자신의 삶과도 관련 있다. 그는 1939년 우파 시온주의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 애썼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작가인 동시에 아랍 국가들과의 평화 공존을 주장한 오즈는 이스라엘 안팎에서 배신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2002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700킬로미터 길이의 분리 장벽이 세워졌을 때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스라엘을 사랑한다. 그러나 아주 많이 좋아하지는 않는다.”
또한 오즈는 유대인이었지만 그리스도교의 성서인 신약성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 결과 탄생한 게 바로 이 소설 ‘유다’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 어느 한 쪽의 믿음만을 취하지 않았기에 배신자로 낙인찍혔던 오즈는 유다와 아브라바네에 대한 긴 변호를 통해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도 변호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 속에는 때때로 자기 시대보다 너무 앞서 태어난 용감한 사람들에게 배신자나 광인이라는 낙인을 찍은 예가 많이 있어요(…) 변화할 의지가 있는 사람은, 어떤 변화도 인정할 수 없고 변화가 생기는 것을 죽을 만큼 무서워하며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변화를 혐오하는 사람들 눈에 배신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어요.”
무엇이 배신이고 누가 배신자가 되는가. 특정 종교에만, 특정 국가에만 필요한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역사를 통해 목격할 수 있다. 오즈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질문은 남겨진 인류의 영원한 숙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