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성의 역사'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인터뷰를 읽었다. 1977년, 저자인 루츠 판 다이크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14세 소년 나누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린란드의 이누이트 부족 소년인 나누크는 남자 아이로 태어났지만 여자 아이로 키워졌다. 이누이트 사회의 성별 분업은 남자는 사냥을, 여자는 가사와 육아를 하는 것이다. 이미 네 아들이 있는데 여섯째 아이가 또 아들로 태어나자 부모는 나누크를 딸로 키웠다. 집안에 여자의 일을 할 사람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나누크는 누나와 함께 요리 등 집안일을 배우며 여자로 자랐다. 이 모든 것은 이누이트 전통에서 유래했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성인이 된 후에 결혼할 때에도. 나누크처럼 딸로 키워진 남자는 딸이 많은 집에서 태어나 아들로 키워져 사냥을 잘 하는 여자와 결혼하면 된다. 코펜하겐 사람들이 성별을 물으면 나누크는 담담히 말한다. ‘나는 그냥 남자이자 여자인 사람이다. 그건 참 좋다.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사회에서는 남성 아니면 여성이라는 젠더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나누크 같은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고 어울려 살았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에 아메리카를 침략한 유럽인들에게 계획적으로 살해당했다.
15세기, 포르투갈은 엔히크 왕자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해외 팽창에 나선다.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동아프리카와 인도, 인도네시아로 가는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한다. 마침내 1498년, 바스쿠 다 가마 일행이 인도에 도착한다.
유럽의 항해자들 중 한 무리는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아 동쪽 대신 대서양 서쪽으로 간다. 1492년,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 일행이 아메리카에, 정확히 말해서 카리브 해의 한 섬에 상륙한다. 이들과 원주민의 관계는 처음에는 비교적 우호적이었지만 곧 달라졌다. 에스파냐 침략자들은 원주민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거나 대대로 살아온 거주지에서 추방했다.
현재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있는 히스파니올라 섬을 시작으로 쿠바, 자메이카, 푸에르토리코 등에 정착지를 세웠다. 사탕수수와 커피, 담배, 카카오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사업을 벌였지만 노동력이 부족했다. 유럽인이 옮겨온 병이 현지에 퍼진 데다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중노동에 시달린 결과 일하던 원주민 대부분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전체 인원이 다 사망해서 부족이 아예 없어진 경우도 있었다. 그러자 유럽인들은 서부 아프리카의 사람들을 인신매매해 와서 노예로 삼았다.
카리브 해 지역만이 아니다. 신대륙의 존재를 알게 된 유럽 각국은 경쟁하듯 아메리카 식민사업에 나섰다. 영국의 헨리 7세는 1497년에 존 캐벗 원정대를 파견한다. 원정대는 캐나다 북동부의 뉴펀들랜드에 도착한다. 1534년에는 프랑스의 탐험가인 자크 카르티에가 세인트로렌스 만에 도착한다. 당시 왕인 프랑수아 1세의 이름을 따서 그 지역을 뉴프랑스로 선언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정착촌을 세우고 모피 무역과 어업을 했지만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 사업은 17세기 중반부터였다. 두 나라는 캐나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끊임없이 충돌하고 전쟁을 했다. 1706년에 뉴프랑스 전 지역이 영국에 항복하여 캐나다는 영국령이 되었다. 이후 1867년, 영국령 북미법에 따라 캐나다 연방이 결성되어 오늘에 이른다.
한편 영국의 월터 롤리는 1584년부터 미국 동부 지역을 탐험한다. 처녀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 지역을 버지니아라 이름 붙인다. 영국은 당시 강대국인 에스파냐가 차지한 중·남부 아메리카를 피해 북아메리카에 집중한다. 1606년, 이주자 143명을 태운 배 3척이 버지니아에 도착하여 제임스타운 정착지를 건설한다.
1년 후 2/3가 굶어 죽어 사업은 실패할 뻔했으나 원주민에게 배운 담배 농사가 성공한다. 그 소식에 더 많은 사람들이 식민지에 이주하기를 원하게 된다. 1620년, 102명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버지니아 북쪽 플리머스에 도착한다. 이들은 미국 역사에필그림 파더스라고 불리며 미국인들의 조상으로 숭배받는다. 이후 미국인들은 1775년에서 1783년까지 전쟁을 하여 영국에서 독립한다.
유럽인들이 이렇게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여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는 동안, 원주민의 인구와 영토는 점점 줄었다. 거주지에서 쫓겨나고 전통 문화도 파괴되어 원주민의 원래 삶의 모습을 알아내기란 어렵다. 당시 기록을 보려고 해도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의 대부분은 기독교도 유럽인들이 쓴 보고서이기에 믿을만하지 않다. 그래도 기록에 의하면 북아메리카의 약 130여개 원주민 부족에 남성과 여성이 아닌 제3의 성별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하는 일은 각 부족 사회의 전통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보통 이들은 여자와 남자 사이에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치유의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져 부상자와 병자를 치료했다. 행운을 가져다주는 사람으로 대접받기도 했다. 이들의 성별 역할은 고정되지 않았다. 전쟁이 나면 전사로 출전하여 용맹을 떨치다가 전투가 끝나면 여자의 옷으로 갈아입고 아기를 돌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성애자, 동성애자는 물론 양성애자가 될 수도 있었고 다른 성별은 물론 같은 성별과도 결혼할 수 있었다.
캐나다에 간 프랑스인들은 여자 복장을 하고 여자 일을 하는 원주민 남성을 목격하자 그들을 ‘베르다슈(berdache)’라고 불렀다. ‘베르다슈’는 원래 성노예라는 뜻을 가진 말에서 유래했는데, 그 당시에는 동성 간에 성관계를 하는 남자를 멸시해서 부르는 말이었다. 반면 원주민들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태어난 성별과 다른 성별로 사는 사람을 ‘두 개의 영혼’이라 불렀다. 두 개의 영혼으로 태어난 아이는 열 살 무렵이 되면 자신의 영혼이 어떤 성별에 더 잘 어울리는지를 생각해서 성별을 선택했다. 어른들이 결정을 도와주기도 했다. 활이나 아기를 업는 천 등 여러 물건을 주어 아이가 고르게 하는 방법을 썼다. 우리나라의 돌잡이 풍습처럼.
그러나 유럽 기독교도 정복자들은 두 개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신의 섭리에 어긋난 존재로 여겼다. 멸시하고 범죄자로 몰아가고 조직적으로 살해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1900년 무렵이 되면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부족 내에서 ‘두 개의 영혼’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시간이 흘렀다. 캐나다에서 성소수자 해방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두 개의 영혼’ 전통을 재발견했다. 그래서 현재 캐나다에서는 성소수자를 의미하는 말이 ‘LGBTQ2’가 된다. 기존에 쓰이던 ‘LGBT’,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바이섹슈얼(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의 알파벳 대문자 각각에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인 퀘스처닝(Questioning)과 성소수자 모두를 포괄하는 단어인 퀴어(Queer)를 뜻하는 Q를 더하고 ‘두 개의 영혼(Two-spirits)'의 숫자 2를 더해서 만든 것이다.
2019년 4월, 캐나다는 동성애를 범죄로 정한 법이 폐지된 지 50년이 된 것을 기념하여 1달러 주화를 발행했다. 두 개의 얼굴들이 붙어있는 주화의 이미지는 ‘두 개의 영혼’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한 개인이 가진 다른 젠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젠더는 고정적이지 않고 다양하게 존재하며 유동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출생 시 부여된 지정 성별은 그 사람의 젠더 정체성과 일치할 수도 있고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전통 시대의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는 이 사실을 알고 ‘두 개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키워내고 함께 살았다. 차별하거나 혐오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남성과 여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상식이었던 사회였다. 그런 사회의 훌륭한 전통을 젠더 이분법을 내세워 서구 백인 침략자들은 파괴했다.
21세기,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서구 백인의 입장에서 서술된 세계사를 배우지 않는다. 콜럼버스는 위대한 영웅이 아니다. 원주민을 학살한 식민주의자이며 백인우월주의자인 측면도 있다. 마찬가지다. 역사를 보는 시각이 바뀌는 것처럼 현재의 젠더 이분법을 당연시 여기는 시각도 바뀔 수 있다. 젠더 역할은 사회적 산물이며 젠더 역시 역사적으로 구성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왕이면 빨리 바꾸도록 하자. 어서 차별 금지법을 제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