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으로 근대가 시작됐고, 근대와 함께 국민국가가 탄생했다. '국민개병제'도 그렇게 시작됐다. 공화국 정부는 18~25세 모든 미혼 남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했다. 신분 대신 '국민'이란 동등한 명찰을 달려면 너나없이 조국을 지킬 의무를 져야 한다는 거였다.
봉건체제에서 그 의무는 영주와 기사, 즉 전문 직업군인에게 있었다. 소작인과 농노도 물론 참전했지만, 그들은 각자 마련한 무기를 챙겨가야 했다. 그 의무는 국방 의무가 아니라 토지 임대 계약의 일부였다. 그들은 국가와 영지가 아니라 일(자신)을 지키기 위한 거였고, 국왕과 영주가 아니라 식솔의 생존을 위해 참전했다. 근대 국가의 징병 군인은 직업과 신분을 떠나 국민이기 위해서, 가족보다 더 크고 원대한 공동체인 국가를 위해서 저 의무를 진다.
오랜 전란 시대를 끝내고 17세기에도 평화 시대의 초석을 다진 혁신적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작은 영지(오와리)의 성주에서 본토의 약 절반을 장악한 배경에는, 리더십과 조총 등 신무기 도입 외에 농민의 군사화란 게 있었다. 사무라이 집단의 천대를 받으며 난리 때마다 농기구를 들고 그들을 따라야 했던 농민에게 노부나가는 무기를 지급하고 전술 훈련을 시켜 정규군화했고, 전과에 따라 신분 상승 등 획기적인 포상을 함으로써 사무라이 못지않은 투지의 동기를 부여했다. 근대 개병제와 상비군체제의 맹아적 형태였다.
대한민국도 건국과 함께 의무복무제를 채택했다. 하지만 징병제를 처음 공론화한 것은 고종(당시 광무황제)의 1903년 3월 15일 조칙이었다. 전란, 징발로 소요가 발생한 뒤에야 "갑자기 소집하여 시장 사람들을 몰아가듯이 하였으니, 어찌 저러한 병사를 쓰겠는가. 이는 나라에 군대가 없는 것이니,(...) 나라는 나라가 아닌 것이다." 신분 불문 18세 이상 모든 남자를 병적에 넣어 3년간 훈련시킨다는 그 구상은 하지만 양반계급의 거센 반발과 엉망이던 호적, 국민교육의 미비 등이 얽혀 결국 백지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