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서로 힘내도록 합시다. 죽지 맙시다. 꼭 살아남아서 이 사회가 바뀌는 것을 같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1년 전 이맘때, 성별재지정수술을 이유로 대한민국 육군으로부터 강제전역 처분을 받았던 변희수 하사는 숙명여자대학교에 합격했지만 온갖 온라인 괴롭힘으로 결국 입학을 포기해야 했던 트랜스젠더 A씨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자신의 커밍아웃 때문에 A씨가 더 큰 비난과 공격을 당한 것은 아닌지 염려했다. 그러면서도 “죽지 말자”고 A씨를 다독였다.
“죽지 말자”는 말은 괜한 수사가 아니다. “자연사 하자”가 안부 인사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저 자기 자신이고 싶을 뿐인데 낯설다는 이유로 낙인찍혀 자신의 몫과 정당한 자리를 박탈당하는 사람들, 어떻게든 지키고자 하는 삶의 테두리 밖으로 기어이 내몰리고 마는 사람들. 그렇게 지난 한 달 동안 트랜스젠더 극작가, 인권활동가, 군인이 세상을 떠났다.
변희수 하사의 부고 앞에서도 여전히 마감을 해야 하는 나는, 쓰던 원고를 덮고 책장에서 한 권의 책을 뽑았다. 미국의 트랜스젠더 인권활동가이자 연극인인 케이트 본스타인이 쓴 '젠더무법자'였다. 이유는 하나, 한국어판 서문에서 읽었던 문장 때문이다.
“마흔네 살에 이 책을 쓰기 시작했어요. (한국어판) 서문을 쓰는 지금은 예순여섯이고요. 지난 20년간 세상에 일어난 변화는 놀랍기만 합니다.”
이어서 그는 미디어에서 백인, 중산층, 중년으로 대표되던 트랜스젠더의 얼굴이 다양한 인종과 계급, 나이대로 확대되고 있다며 즐거워한다. 2016년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런 내용이 어쩐지 어색하면서도 좋았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살짝 당겨 본 것 같았다.
본스타인은 자연에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다양한 섹스를 외부 성기 모양에 따라 남성/여성 두 개의 성으로 분류하는 성별이분법에 기대어 남성성과 여성성의 신화를 개인에게 배분하여 강요하는 시스템을 ‘젠더’로 규정한다. 이때 젠더는 남근중심적이고 성기 중심적이며, 의료화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교란하고 횡단하는, 그야말로 트랜스젠더이자 레즈비언이며 'BDSM 플레이어'인 자신을 ‘젠더무법자’라 칭한다.
책에 수록되어 있는 한 연설에서 본스타인은 “젠더는 안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페니스가 ‘있는’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없는’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신화는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여기고 대상화한다. 더불어서 그 신화에 들어맞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고, 배제하고, 심지어 파괴하려 든다. 수많은 젠더폭력이 그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연설을 이어간다. “젠더는 분별이 없다”고. 이 세상의 다양한 섹스와 섹슈얼리티를 “흑 아니면 백”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분별 있는 태도가 아니다. “둘뿐이라고, 이것 아니면 저것에 들어맞아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것에는 분별이 없다.” 그리고 심지어 “젠더는 합의된 것”도 아니라고 덧붙인다. “태어나면 의사가 성별을 지정”할 뿐, 나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를 선택하고 협상하고 합의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본스타인은 제안한다. “분별 있는 젠더는 아주아주 재미날 것입니다. 합의된 젠더는 각자의 젠더 정의를 존중하고, 혼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존중하고, 자신이 원할 때 포용되고픈 의향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합의된 젠더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아 비폭력적입니다. 합의된 젠더는 젠더에서 추방된 자를 모두 팔을 벌려 환영합니다.”
이 글은 부고다. 죽음을 알리는 문서다. 또 이 글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용기 내서 내미는 초대장이다. 그래도 살자고, 함께 마흔넷이 되고, 예순여섯이 되자는 포스트잇이다. 하루하루 변화를 쌓아서 20년 후엔 요란스럽게 축하할 수 있기를 꿈꾼다. 나는 오늘부터 다시, 뭐든 좀 더 열심히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