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이 여성 탓?...여성 우대 않는다면 인구문제 해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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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6 04:30
12면

편집자주

※우리 사회의 출생아 수 감소와 고령자 수 증가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빠릅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인구쇼크’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미래가 예상되고 대응 전략은 무엇인지, 경제학자이자 인구 전문가의 눈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전영수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가 <한국일보>에 3주 단위로 토요일 연재합니다.


<16>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인구변혁’

세상은 바뀐다. 삶에 휩싸여 하루하루 살다 보니 변화에 둔감해지나, 지난 후엔 달라진 풍경에 서 있음을 진하게 느낀다. 2020년을 잃어버린 해로 전락시킨 코로나19 이후의 달라진 생활 면면도 그렇다. 향후 세상변화와 생활 변경은 더 심화될 것이다.

이때 인구변화만큼 강력한 설명변수는 없다. 수많은 기타 요인이 많지만, 인구변화에 견줄 광범위한 영향력은 없다. 시대변화와 관련해 인구는 사실상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래를 읽어내는 가장 포괄적인 체크 항목이다. 인구를 모른다고 당장 삶이 뒤바뀌진 않으나, 인구를 알면 최소한 미래로의 길은 엿보인다.


여성인구의 달라진 힘 ‘한국사회=여초환경’

인구변화에 가장 밀접한 연관주체는 과연 누굴까. 스스로 변할뿐더러 덩달아 변하는 트렌드의 주역은 여성으로 압축된다. 남녀노소 전방위의 인구변화에도 불구, 시대전환을 이끄는 강력한 추동집단은 특히 청년여성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인식변화와 맞물린 정책전환이 한몫했다. 제2기 출산정책으로 평가되는 인구자질 향상기(1996~2003년)를 계기로 확인된 청년여성의 입지와 능력이 부각된 결과다.

제2기는 제1기(인구증가 억제기·1961~95년)와 제3기(저출산고령사회 대응기·2004년~현재)의 가운데에 위치한다. 여성권리 보호·신장을 통한 남녀평등의 실현이 정책핵심이다. 양보다 질로 인구경쟁력을 높이는 차원이다. 이때부터 한국사회는 남녀차별이 줄고 균등기회가 늘며 배제된 여성의 본격적인 사회참여가 촉진됐다.

굴레였던 성차별이 줄어들며 가정·사회의 위상은 달라졌다. 공고했던 비정상의 정상화 단계였다. 여전히 부족한 상황·인식이나, 과거보다 확실히 달라진 건 체감된다. 연령이 낮을수록 차별은 해괴하고 저급한 일로 인식된다. MZ세대에게 남녀평등은 자연스럽다.

남녀비중은 역전됐다. 한국은 숫자로도 여성이 더 많은 사회가 됐다. 2020년 말 여성(2,598만명·50.1%)이 남성(49.9%·2,584만명)을 다소 앞선다(주민등록인구). 여성이 전년보다 약 3,000명 늘어난 데 비해 남성은 2년 연속 줄어 폭을 키웠다. 원래는 안 그랬다. 2015년까지 한국인구는 ‘남자 〉 여자’가 일반적이었다.

성별 역전은 60대 이상 여성인구가 이끈다. 50대까지는 근소하게 남자가 많지만, 환갑 이후 고령여성이 압도적인 비중이다. 가령 70대 이상은 여성(337만명)이 남성(233만명)보다 100만명 이상 많다. 평균수명의 성별차이를 감안하면 여초환경은 추세로 안착된다.

‘고령화=여성화’의 완성이다. 더욱이 평등대우가 상식인 MZ세대가 늙어가면 사회 전체의 차별의식은 더 옅어진다. 결국 여성인구의 달리진 힘은 본격화될 것이다.



인구학은 여성학 ‘정책 성패는 여심 장악에 달려’

한국사회가 여성에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인구변화 때문이다. 인구문제가 아닌 인구변화라 칭하는 건 불필요한 오해보다 건설적인 논의를 위해서다. 인구변화가 문제면 남녀 모두의 귀결 사유다. 저출산 탓을 여성에게만 강요해선 곤란하다. 출산부터 양육까지 여성 홀로 불가능한 사회다. 그럼에도 인식과 통계는 여전히 전근대적이다. 사실상 ‘젊은 여성’에게 모든 올가미를 씌운다. 심지어 일본은 20~39세 가임기 여성을 ‘인구재생산력’이라 부르는 새로운 명칭까지 만들었다. 낮은 출산율의 원인을 찾고자 유배우출산율(출산아/기혼여성)이란 통계도 동원된다. 결혼하면 2명을 낳는데, 통계(합계특수출산율)에 미혼여성을 넣어보니 0.84(2020년 3분기)명까지 떨어졌다는 취지다. 실제 유배우출산율이 2.23명(2000~16년)이란 연구결과도 있다

독신 여성에게 저출산 프레임을 던지는 해석의 오류라 아쉬움이 남는다. 결혼을 안 해 덜 태어난다는 논리는 맞지만, 더 중요한 건 결혼이 여성 혼자만의 선택은 아니란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면 혼외출산이 일반화된 프랑스 사례도 설명하기 어렵다. 오죽하면 출산율 대신 가치 중립적인 출생률을 쓰자고 반발할까.

저출산이 문제이고 젊은 여성이 원인이면 더 정확하고 엄밀한 정책 대응이 필수다. 이들이 왜 출산하지 않는지 관찰하고 질문하는 게 먼저다. 편견과 오해만 잔뜩 쌓는 미스매칭의 대응 논리는 틀렸다.

사례는 많다. 가령 2016년 정부가 발표해 항의와 반발을 낳았던 출산 지도는 정책당국의 안일한 인식과 시선을 그대로 노출했다. 가임기 여성 숫자를 지자체별 순위로 보여줘 출산을 경쟁화시킨 실수를 범했다. 정작 중요한 출산환경 악화문제는 빼고 출산을 여성책임화·도구화한 황당한 일이었다. 결국 취소했지만, 뒷맛은 썼다. ‘저출산=여성화’의 공고한 당국 발상만 확인됐다.

여성을 출발로 출산통계를 내는 건 용이하고 명확한 관례 탓이다. 실제 인구학의 경우 최소한 출생은 여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로써 여성을 통계수치나 단위로 보는 경향이 나타난다. 심하게는 여성을 수단화하는 우를 범한다. 물론 통계로 출산을 보는 건 타당하다. 다만 다양한 비교·변수를 넣어 여성의 삶과 선택에 포커스를 맞춰 변화를 관찰하는 게 좋다. 이때 실효적인 통찰을 얻어낼 수 있다. 인구학자 폴 몰런드는 여성이 과거 200년간 급진적인 자기 결정권을 확보하고 몸을 제어한 원인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하며 또 고무적인 인구 스토리가 될 걸로 봤다.


청년여성에 길을 물어라 ‘인구정책=여성정책’

하늘 아래 새로운 정책은 거의 없다. 단번에 문제를 풀어낼 즉효처방은 특히 없다. 인구대응은 더더욱 그렇다. 요란한 빈수레란 악평을 피하자면 원점부터의 재검토가 요구된다. 문제를 곡해하고 회피하는 한 실효책은 멀어진다. 상식적인 얘기나 인구해법은 청년여성에게 묻는 게 대전제다.

문제해결의 첫발은 당사자성이다. 당사자일수록 문제와 해법을 가장 잘 아는 법이다. 돌아보면 안 그랬다. 근사하게 차렸으나 당사자의 심중·지향은 배제됐다. 주체여야 할 이들을 객체화했으니 풀리기는커녕 엉킬 수밖에 없다.

여성이 힘든 사회에 출산은 긍정적이지 않다. 2030세대의 출산파업은 과거 잣대로 풀 수 없다. 고학력에 다양한 가치관의 이들에게 ‘출산 vs. 직장’의 양자택일은 뻔한 결과만 낳는다. 이미 확인된 0명대 출산율이 증거다. 돈으로 풀겠다는 건 틀렸다. 1983년 인구유지선(2.1명)을 깬 후 40여 년에 걸쳐 반등기미 없는 추세하락은 재정 인센티브로서 출산장려가 의미 없음을 뜻한다. 지금처럼은 곤란하다. 존재하나 기능하지 않은 정책이란 비판을 받아들일 때다.

성글지만, ‘인구학=여성학’의 접근이 권유된다. 나아가 인구정책은 가족 정책으로 포괄되는 방식이 자연스럽다. 시대변화에 조응할뿐더러 당위적이고 효과적이다. 여성을 하대할수록 출산율은 낮아진다. 인구 반등까진 아니라도 최소한 하락세를 묶어낸 국가의 공통교훈이다. 스웨덴은 2000년 1.5명까지 떨어진 출산율이 2019년 1.7명으로 회복됐다. 이탈리아·스페인도 20년째 ±1.3명을 유지한다. 다른 이유도 많지만, 한국과 차별적인 최대배경은 남녀평등·양립조화의 강화 실현으로 요약된다.

맞벌이는 자연스럽고 양육부담의 쏠림은 꽤 개선됐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돌봄의 사회제도화도 온도차가 있다. 유럽의 성과는 장기간 이해당사자의 속내를 묻고 선택을 도와준 과정에서 비롯된다. 더 늦기 전에 한국도 청년여성을 정책현장에 초대해 눈높이를 맞추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균형감을 잃은 성별대결은 안 된다. 남녀는 함께 손잡아야지 서로를 짓밟고 넘어갈 상대일 수 없다. 갸우뚱거린다면 상식과 양심에 묻는 게 좋다. 한국사회는 아직 건강하다. 편 가르기는 극단적 확정편향에 기댄 인지 부조화의 고백과 같다. 낡고 성근 프레임은 버릴 때다. 여성이 웃는 사회에 희망은 싹튼다. 세상의 반은 여자다. 이들이 불편해하면 미래는 고달파진다. 인구충격을 인구혁명으로 삼는 달라진 대응 체계의 출발점이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