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를 수 없는 페미니즘, 멈추고 싶을 때까지 앞으로

입력
2021.03.0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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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즘 책 3배 급증

페미니즘은 더이상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흐름이 됐다. 출판계도 마찬가지다. 매주 쏟아지는 신간에서 페미니즘 관련 책이 없는 날이 없다. 2015년 페미니즘 논의의 대중화를 이끈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5년 사이 페미니즘 관련 서적은 3배 가까이 늘었다. 4일 교보문고 집계에 따르면 2015년 한 해 출간된 페미니즘 관련 책은 37권에 불과했지만, 2016년 53권으로 늘더니, 2019년에는 99권으로 치솟았다. 작년에도 코로나 악재를 뚫고 80권이 나왔고 올해 역시 전년 동기 대비 판매량이 5.3% 증가하며 페미니즘 책 열풍을 이어가고 있다. 양만 늘어난 건 아니다. 기성 페미니즘을 벗어나 더 젊고 다양해진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게 최근의 두드러진 흐름이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페미니즘 관련해 주목되는 신간 3권을 모아봤다.

◇주류 페미니즘에 대한 고발장

‘모든 여성은 같은 투쟁을 하지 않는다’(서해문집)는 주류 페미니즘에 대한 고발장이다. 저자인 미키 켄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페미니스트의 이력과는 거리가 멀다. 빈곤층 비율이 높고 흑인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학계에서 페미니즘을 배우지 않았으며, 직업은 군인이었다. 책의 원제는 ‘후드 페미니즘’(Hood Feminism)’. ‘후드’는 켄들이 자라난 도심의 빈민 지역, 즉 비주류들의 공간을 상징한다. 2013년 ‘#연대는백인여성을위한것이다’란 해시태그 운동으로 이름을 알린 켄들은 책에서도 주류 페미니즘의 요구가 다른 여성을 희생하여 백인 중산층 여성이 안락함을 누리는 데 맞춰져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부계 성이라든가, 체모, 최고경영자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한 토론이 현대 페미니즘 담론의 중심에 서 있는 동안, 주변화된 여성들이 겪는 문제는 페미니즘으로 다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그는 주거, 교육, 노동, 의료 분야의 불평등, 식량 불안, 젠트리피케이션, 범죄, 총기 폭력 등 우리 삶을 둘러싼 거의 모든 문제가 페미니즘 이슈라고 강조한다. 이게 왜 페미니즘이냐고 묻는 당신에게 켄들은 말한다. “이것은 살아있는 페미니즘이다. 사람들이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그 경험 말이다.” 주류 페미니즘에 대한 저격은, 페미니즘 내부의 분열을 가져올 거란 우려를 낳기도 한다. 이에 켄들은 페미니즘을 논할 수 있는 여성의 자격은 없다고 맞받아친다. 페미니스트를 ‘시스젠더-비장애인-대졸-수도권에 거주하는' 여성으로 상상할 때,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지워지고 그들이 겪는 문제가 사라진다. 여기서 누락된 목소리를 살피지 않으면, 페미니즘이 부르짖는 해방의 수사는 여성을 해치는 또 다른 억압이 될지 모른다.

◇여성의 당당한 ‘몫’을 찾아 나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가시적 해결책은 결국 정치다. ‘걸어간다, 우리가 멈추고 싶을 때까지’(현암사), ‘여성, 정치를 하다’(민음사)는 기성 정치권에서 할당되지 않았던 여성의 ‘몫’을 직접 찾아 나선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먼저 ‘걸어간다, 우리가 멈추고 싶을 때까지’는 201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페미니즘에 관심 없는 기성 정당들을 대체하고자 만든 ‘페미당당’의 활동가들이 2년간 진행한 세미나를 묶은 책이다. 여성 차별과 싸우는 과학 연구자, 낙태죄 이후의 길을 만들기 위해 개정 법안을 연구하는 젠더 법학 연구자,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트랜스젠더 변호사, 아이들이 차별적 관습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성평등 교육을 주장하는 교사까지. 정치, 범죄, 대중문화, 법, 여성학, 교육,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20, 30대 활동가 9명이 한국 사회에서 떠오른 젠더 문제에 대해 ‘어른’ 페미니스트의 도움 없이 스스로 묻고 답한 글들이다. 이들은 페미니즘이 논쟁 속에 존재하거나, 운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개인의 삶과 닿아 있는 문제임을 상기시킨다.

‘여성, 정치를 하다’는 다양한 배경과 이력을 가진 전 세계 여성 정치인 21명의 삶을 통해 정치의 의미를 되묻는 책이다. 뒤로 빠지기보다는 치고 받는 정치 싸움을 즐겼던 앙겔라 메르켈부터 대처리즘이란 말로, 세계 정치사의 획을 그은 마거릿 대처, 1960년대 반문화의 상징으로 등장한 뒤 지금도 시위 현장에서 통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는 포크가수 존 바에즈 등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여성들의 멈춤 없는 행보가 가슴을 뛰게 한다. 그들은 실패할 걸 알면서도 앞으로 갔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이 새 길을 만들어가는 초석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멈추고 싶을 때까지 걸어간다. 걸어가며 매번 새로운 곳에 도착할 때마다 과거를 다시 발견할 것이다.” 페미당당의 젊은 활동가들의 외침 역시 다르지 않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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