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친구는 일곱 살 때 사귀었다. 나는 두 살 터울의 오빠와 오빠 친구들을 따라서 온 동네를 쏘다니며 크고 작은 말썽을 부리는 왈가닥 꼬마였다. 어느 날 공터를 사이에 둔 옆집에 누군가 이사를 왔고,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던 나는 벽을 타고 올라 옆집 마당을 구경했다. 내 또래의 여자아이가 동화책을 보고 있었다. 싫증을 잘 느끼는 나는 쳐다만 보고 있는 게 금세 지루해졌는데, 내 눈에는 동화책을 읽고 있는 그 아이도 그런 것처럼 보였다. "나가서 나랑 놀지 않을래?" 내 말에 그 아이가 대문을 열고 나왔던 그 순간부터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까지, 우리가 친구가 아니었던 적은 없다.
'파이어플라이 레인'의 털리 하트(알리 스코비)와 케이트 멀라키(론 커티스)도 그렇게 만난다. 케이트가 사는 '반딧불이 길(Firefly Lane)'에 털리가 히피인 엄마를 따라 이사를 온다. 같은 정류장에서 스쿨버스를 타지만 조금 떨어져 어색하게 서로를 관찰하던 두 사람은 털리가 위험한 일을 겪은 어느 날 밤, 비밀을 나누면서 친구가 된다. 그날 이후부터 매력적이고 눈에 띄는 외모의 털리와 소심한 성격으로 커다란 안경 속에 반짝이는 눈을 숨겨둔 케이트는 누구도 떨어뜨릴 수 없는 단짝으로 지낸다. 1974년의 일이다.
이야기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1980년대로 간다. 성인이 된 털리(캐서린 헤이글)는 작은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다. 털리는 케이트를 프로듀서 조니(벤 로슨)의 비서로 취직시켜주고, 케이트는 조니에게 첫눈에 반한다. 다시 뛰어넘어 2003년이다. ‘파이어플라이 레인’의 타임라인에서 현재라고 볼 수 있는 시기로, 털리와 케이트는 40대 초반이 되었다. 그사이 털리는 무려 엘런 드제너러스와 비견되는 TV쇼 진행자가 되었고, 펜트하우스에 홀로 살고 있다. 케이트는 열 네 살 딸의 엄마가 되었고, 종군기자로 이라크로 가기를 원하는 조니와 이혼 절차를 밟는 중이다. 삶을 둘러싼 풍경은 많이 달라졌지만, 둘은 여전히 친구다.
'파이어플라이 레인'은 크게 보았을 때 세 시간대를 오가면서, 우정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싸구려 목걸이를 나누어 가졌던 두 소녀가,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어떻게 여전히 친구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뛰어난 재능과 타고난 매력을 가진 털리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어린 시절 자신의 손을 놓고 떠나간 히피 마약 중독자 엄마가 준 마음속의 그늘 때문에 사랑을 믿지 않고 가족도 만들지 않는다. 서로를 아껴주는 따뜻한 가정에서 자라난 케이트는 우여곡절을 딛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지만, 이혼 위기와 경력 단절 상황에 처해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고 그 누구보다 잘 알지만, 서로에게서 갖지 못한 것을 본다. 두 사람에게는 같이 쌓아온 시간만큼의 애정과 함께, 어쩌면 동일한 크기의 상처, 불편한 마음, 질투가 있다. 두 사람은 그런 감정을 안고도 서로가 있는 세상에 살아가기를 택한 것이다. '파이어플라이 레인'은 그래서 이들이 친구인 거라고 말한다. 시작과 끝도, 관계의 깊이나 맺어나가는 방식도 개인마다 너무나 다르고 복잡한 우정은, 그럼에도 친구로 남고자 하는 마음과 노력, 배려, 시간을 통해서만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 타임라인을 오가며 이들의 관계 안에 새겨진 무늬들을 하나씩 드러내 보여줄 때 '파이어플라이 레인'의 이야기는 깊어지고 흥미로워진다. 언제나 관계의 중심이 되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털리가 자신의 가족에게마저 자신보다 더욱 큰 관심을 받는 걸 지켜보던 케이트는 말한다. "이건 그저 너의 인생이고 나는 얻어타고 가는 기분이야." 이 기분은 털리가 전학 오자마자 친구들의 관심을 받는 걸 지켜봤던 스쿨버스에서부터 느껴온 감정이다. 그렇다면 털리는 어떨까? 케이트가 출산해 엄마가 되면 자신과의 관계가 변화할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털리는 그 시간이 찾아오는 걸 두려워한다. 케이트가 아기를 낳던 날, 케이트의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분만실에서 밀려나면서 털리는 각인된 어린 시절의 고통, 엄마가 군중 속에서 자신의 손을 놓아버렸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린다. 두 사람의 우정은 함께 행복했던 시간뿐 아니라 서로 조금씩 어긋나고 상대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시간까지 함께 쌓여 만들어진 것이다.
털리와 그의 엄마, 케이트와 그의 딸로 이어지는 모녀 관계는 털리와 케이트의 우정만큼이나 이야기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엄마이거나 딸이거나 친구인 인물들은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에게 계속 소중한 존재로 남기 위해서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한다. 털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타이틀이 '걸프렌드 아워'인 것이 우연일 리 없다. 이는 '파이어플라이 레인'의 부제나 마찬가지다. 여자친구들 사이의 시간이며, 여성인 친구가 겪고 있는 관계와 시간이 이 작품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캔디 캔디' 속 캔디와 애니는, '빨간 머리 앤'의 앤과 다이애나는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었을 때도 친구였을까? 서로의 손을 굳게 잡고 우정을 맹세한 소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서로에게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면, 서로에게서 고통받을 때조차 곁에 있어 주기로 결정하고 그대로 행동한다면, 그들도 털리와 케이트가 되었을 것이다. 30년 넘은 세월을 함께해도, 심지어 한때 한 몸에 살았던 모녀라고 해도, 관계는 노력해야만 유지되는 것이라는 교훈을 그사이에 얻기만 했다면. 나무의 옹이가 상처만이 아닌 성장의 증거가 되듯이, 상처나 아픔을 안고도, 어쩌면 그 시간들 덕분에 개인도, 관계도 성장한다.
그래서 '파이어플라이 레인'은 잘 만든 통속극이다. 우정과 가족, 관계라는 대중적인 주제를 다룰 뿐 아니라, 모든 인물이 가족이나 결혼과 같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중시하는 작은 세계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은 세계에 사는 소수의 사람들은 우연한 사건 속에서 자주 엮인다. 쉽게 오해하고, 타이밍이 맞지 않고, 위기도 자주 찾아온다.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은 과거의 어떤 순간과 겹쳐지거나 이어져 있다. 이 세계에서 불행과 행복은 등을 맞대고 있고, 나쁜 일은 좋은 일만큼이나 자주 찾아온다.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위기는 매 회차의 마지막 순간, '다음 에피소드' 버튼을 누르고 싶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파이어플라이 레인'의 또 다른 매력은 레트로 정서다. 흔히들 미국의 레트로를 생각할 때 떠올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감성뿐 아니라, 곧 20년 전이 되는 2000년대 초반의 분위기까지 함께 볼 수 있다. 한국의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과거와 시대 분위기를 소환하되, 시절의 흐름에 따른 인물들의 변화까지 담아내는 구성이다. 여기에 극 중 현재로부터 2년 뒤인 2005년의 일부를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이 이야기를 따라가도록 붙들어놓는다. 2년 뒤의 케이트는 털리를 다시는 보지 않고 살아가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왜? 예상했겠지만, 아마도 그사이의 이야기가 시즌2에 전개될 듯하다. 마지막회에 워낙 많은 '떡밥'들이 뿌려져있는 만큼 힘든 기다림이 되겠지만 나처럼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크리스틴 한나의 동명 원작 소설 결말을 미리 찾아보는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두 번째 시즌을 기다리는 일이 두 배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옆집에 살았던 친구와 나는 지난 주말에도 함께 시간을 보냈다. 20년 이상 우정이라는 관계를 유지해 온 또 다른 여자 친구들과 함께였다. 우리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소리 지르며 싸우기도 했고, 서운해 울기도 했다. 상처를 주고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고 또 받으면서도, 우리는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주 웃으며 계속 떠올릴 추억을 만들었고, 삶의 중요한 사건과 인생의 고비마다 곁에 있어 주었다. 우리들은 털리와 케이트 같지는 않다. 더는 가까운 동네에 살지 않고, 삶의 사건 사고와 심경의 변화를 모두 공유하지도 않는다. 친구들이 결혼과 출산을 겪으며 생겨난 변화도 있다. 그럼에도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서로에게 시간과 마음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한, 우리는 계속 친구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 나가서 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이 견딜 만해 질 거라는 것도 안다. 영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파이어플라이 레인 소녀들이여, 영원하라"라는 두 사람의 구호를 우리 식으로 바꾸면 "하남의 딸들이여, 영원하라"가 된다는 점이 좀 마음에 걸리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