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떠나는 현실…성범죄자 주거 제한, 한국서 힘든 이유

입력
2021.03.0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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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 성범죄자 출소 때마다 '들썩'
거주지 제한 '조두순법' 쏟아졌지만
국민 공분에만 초첨...기본권 침해 논란
"최소한 피해자 거주 시군구는 피해야"
"심리치료·전자발찌 병행해야" 지적도

"어떤 성범죄 피해자가 가해자랑 가까운 공간에 사는 걸 감당할 수 있겠어요. 보복의 두려움을 떠나 그건 트라우마의 문제예요."

'조두순 사건' 피해자 심리치료를 도왔던 신의진 연세대 소아정신과 교수는 1일 지난해 11월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 가족은 한 달 뒤 조두순이 출소해 경기 안산시에 다시 정착한다는 이야기가 들리자 고향과 같은 이곳을 떠났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해자와 같은 생활권에 머문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신 교수는 이사 비용 마련을 위한 시민 모금을 도왔고, 피해자 가족은 다른 지역에 전셋집을 얻었다. 신 교수는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조두순 출소 후 3개월이 돼 가지만,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할 방법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미흡하다"며 답답해했다.

성범죄자가 출소할 때마다 한국 사회는 두려움과 공분으로 들썩였다. 조두순 출소가 예고됐던 지난해 말에도 그를 사회와 격리하고 거주지를 제한해야 한다는 논의가 잇따랐다. 하지만 정치권이 국민적 공분에만 편승해 현실성이 떨어지는 법안을 쏟아내면서 사회적 논의는 오히려 후퇴했다. '가해자가 피해자 거주지와 같은 동네로 돌아가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냐'는 최소한의 사회적 공감대를 담은 법안마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공분에만 편승한 정치권의 포퓰리즘성 제한법... 사회적 논의는 후퇴

여야 정치권은 지난해 조두순 출소를 앞두고 국민 불안감이 커지자 앞다퉈 각종 '조두순 방지법'을 쏟아냈다. 고영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아동 성범죄 전과자를 자신의 주거지에서 200m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같은 당 정춘숙 의원도 가해자 접근거리를 피해자 집으로부터 1㎞ 이상으로 하는 법안을 냈다. 하지만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는 법안들이라 국회 논의는 진전되지 못했다.

국회 통과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포퓰리즘성 법안 발의는 20대 국회(2016~2020년) 때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발의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 72건 중 43건(59.7%)이 제대로 논의조차 못한 채 자동폐기됐다. 현실적 숙고가 부족했던 탓이다. 신 교수는 "이름 난 성범죄자들이 출소할 때마다 엉성한 법안들이 줄줄이 발의되지만 결국 실현 가능한 대책으로 이어진 적은 손에 꼽는다"고 지적했다.



美 제시카법 "한국선 힘들어"...우리 현실에 맞는 제도 공론화 필요

성범죄자 재활을 돕고 치료를 해본 전문가들도 정치권의 여론몰이식 '성범죄자 거주지 제한법' 발의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재범 방지 효과가 떨어지고 되레 피해자에 대한 증오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 생활조건이 마련돼 있지 않으면 출소자들이 심리적 압박을 받아 오히려 재범 우려가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30개 이상 주(州)에서 성범죄자 주거제한법을 마련해 시행 중인 미국의 사례는 본보기가 된다. 성범죄자가 학교와 공원 주변 600m 이내에서 살 수 없도록 한 '제시카법'이 가장 강력한 법인데 일부 지역에선 성범죄자만 몰려 있는 외곽지역에 마을이 생겨나기도 한다. 학교와 공원을 피해 성범죄자가 살 수 있는 곳은 거의 없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밀도가 워낙 높아 이를 그대로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 중론이다. 전국 곳곳에 자리잡은 교육시설을 피해 그들만의 특수한 거주지를 찾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의 경우 전체 면적 605.5㎢ 중 녹지 등을 제외한 주거지역 넓이는 325.9㎢로, 신상공개 대상 성범죄자 522명(2020년 말 기준)의 활동지(반경 500m 기준) 합계 면적인 409.8㎢보다도 좁다. 특정 지역에 몰아넣지 않는다면 성범죄자 격리 수용은 사실상 불가능한 셈이다.


"격리만으론 증오심만 키워...심리치료·전자발찌 시스템 보완해야"

이 때문에 성범죄자 거주지를 일괄적으로 제한하기보다는 최소한 피해자 거주지와 같은 동네로 돌아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성범죄자 주거 문제와 관련해 피해자가 가해자 출소 후 2차 피해를 입지 않도록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가족부가 2019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을 통해 분석한 결과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의 절반 이상(54.7%)은 거주지역과 범행지역이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 3건 이상 성범죄를 저지른 연쇄 성범죄자의 절반 정도는 행정구역상 주거지와 동일한 지역에서 범행을 이어가는 경향을 보인다는 한국공안행정학회의 연구 결과도 있다.

국회에도 현재 출소한 성폭력사범이 피해자 주거지와 같은 시·군·구에 거주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법률안이 발의돼 있다. 하지만 조두순이 대중적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구체적인 논의는 실종된 상태다.

전문가들은 피해자 안전을 도모하고 재범률을 낮추기 위해선 거주지 제한 하나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심리치료 강화를 포함한 근본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성범죄 출소자를 교육하는 코사코리아(COSA Korea)의 박정란 대표는 "사회에서 격리시키면 증오심을 키울 수 있고, 재범 위험성을 낮추려는 목표와도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리치료나 교화 프로그램으로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을 얻게 해야 보복 등 위험성도 사라진다"고 지적했다.

이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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