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 5주 만에 중동정책 숙제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26일(현지시간) 트럼프 행정부 때부터 묵혀뒀던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암살 이슈 결론을 냈다. 동맹국 사우디의 책임을 물으면서도 최고 실권자인 왕세자는 제재 대상에서 빼는 절충안이었다.
앞서 이란핵합의(JCPOAㆍ포괄적공동행동계획) 복원 시동 당근 제공에 이어 25일 시리아 내 친(親)이란 민병대 폭격으로 채찍질도 가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임기 초부터 복잡다단한 중동 문제 해결에 강온 양면전략으로 첫 발을 내디딘 형국이다. 하지만 수십년 묵은 난제에다 중동 각 국가의 이해관계도 엇갈려 단기간 내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미 워싱턴포스트(WP)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사우디 왕실을 비판하던 자말 카슈끄지는 2018년 10월 터키 이스탄불 사우디 영사관에서 잔혹하게 살해됐다. 국제사회 비판 여론이 일자 사우디에서 수사해 현지인 8명에게 징역형을 확정한 상태다. 미 국가정보국(DNI)이 이번에 공개한 카슈끄지 암살 사건 기밀 해제 보고서는 여러 차례 제기됐던 의혹을 공식화한 의미가 있다.
보고서의 핵심은 2017년부터 사우디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는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카슈끄지 사건에 어떤 책임이 있는지 밝힌 대목이다. 보고서는 “무함마드 왕세자는 카슈끄지를 왕국에 대한 위협으로 봤고 그를 침묵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광범위하게 지지했다”며 “왕세자가 카슈끄지를 생포하거나 살해하는 작전을 승인했다”라고 적시했다. 왕세자를 경호하는 왕실경비대 신속개입군 소속 요원 7명이 카슈끄지 암살 작전에 참여한 것으로 볼 때 왕세자가 사건을 몰랐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왕세자에게 면죄부를 줬다. 사우디 전 정보국 부국장을 제재하고, 76명의 미국 비자 발급을 중지하는 등 ‘카슈끄지 금지 규정’도 도입했지만 암살 지시의 정점에 있는 인물은 뺀 것이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바이든 대통령이 왕세자 직접 제재 시 외교적 부담이 너무 크다고 판단한 것”이라는 고위 당국자 설명을 전했다. 현재 85세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은 곧 35세 왕세자에게 왕위까지 물려줄 것으로 예상된다. 중동 핵심 동맹국인 사우디 차기 국왕을 제재한 상태에서는 중동정책을 펼치기는 어렵다고 미국이 판단한 셈이다. 중동 대(對)테러전 수행과 시아파 이란 견제 작업에 수니파 수장 사우디를 계속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 외교정책 역시 트럼프 행정부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가 카슈끄지 보고서 공개를 빌미로 사우디에 무기 판매 장사를 해왔다면, 바이든 행정부는 국익에 가려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고 넘어가는 식이 됐기 때문이다.
인권을 중시하겠다는 바이든 행정부가 범죄행위라도 미국 이익에 도움만 되면 묵인해준다는 잘못된 신호라는 지적도 있다. NYT는 “인권단체와 여당인 민주당 구성원들을 실망시킬 수 있는 결정”이라고 전했다.
중동정책 전반이 꼬일 가능성도 있다. 먼저 이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25일 이란 인근 오만 해상에서 발생한 이스라엘 화물선 폭발 원인이 이란 공격으로 추정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란 외무부는 27일 “군사적 긴장과 역내를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라며 시리아 폭격에 반발했다.
미국은 예멘 내전용 무기 판매 중단으로 사우디를 이미 몰아세우던 상황에 카슈끄지 보고서까지 나왔다. 이스라엘과의 관계도 트럼프 행정부 때만큼 밀도가 높지 않다. 중동에서 미국의 확실한 우군을 찾기 어려운데 이란의 반발이 거세질 경우 이를 제어하기 어렵게 된다는 점도 미국의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