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 배후를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로 공식적으로 지목하면서도 관련 제재 대상에서 왕세자를 제외했다. 사실상 실권자인 왕세자를 완전히 적으로 돌릴 수 없다는 판단이 엿보인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외교정책에서 주요 가치로 인권을 강조했지만 중동 내 핵심 동맹인 사우디를 잃을 수 없는 현실에 부딪힌 것이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미국 국가정보국(DNI)이 26일(현지시간) "무함마드 왕세자가 카슈끄지를 생포하거나 살해하는 작전을 승인했다고 평가한다"는 내용의 4쪽 분량 기밀 보고서를 공개했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사우디 왕실을 비판한 카슈끄지는 2018년 10월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살해된 후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우디 법원이 카슈끄지 살해 혐의로 8명에게 최고 징역 20년형을 선고했으나 무함마드 왕세자가 사건 배후라는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날 공개된 보고서는 카슈끄지를 살해한 팀에 왕세자의 승인 없이 참여할 수 없는 개인 경호요원 7명이 포함된 사실에 주목했다. 왕세자가 평소 카슈끄지를 '왕국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고 그를 침묵시키려 폭력적 수단 동원까지도 광범위하게 지지했다는 주장이다. 사건에 관여한 21명을 적시한 보고서는 "이들이 무함마드 왕세자를 대신해 카슈끄지의 죽음에 연루되거나 책임이 있다"는 강한 확신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는 왕세자에 대한 어떤 직접적 조치도 추진하진 못했다. 이번 NDI 보고서를 토대로 이날 미 재무부가 내린 사우디 시민권자 76명에 대한 비자 발급 제한 등의 제재 조처 목록에 왕세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블룸버그통신은 "적어도 왕세자를 제재할 계획이라는 징후는 현재 없다"고 전했다. 사우디 왕이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이미 실권자인 왕세자가 오랜 기간 사우디 권력을 장악할 것으로 전망돼 그에 대한 제재를 결정하긴 부담스럽다는 해석이다. 사우디는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대표적인 미국의 우방으로, 이란 견제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동맹국이다.
다만 미국 내부에서는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표출될 수 있다. 일간 뉴욕타임스는 "인권단체와 여당인 민주당 구성원들을 실망시킬 수 있는 결정"이라고 평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후보시절부터 카슈끄지 사건에 대해 정확한 조사와 제재가 필요하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혀왔고 인권 문제에서 전임자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차별화를 보여주겠다고 장담해왔기 때문이다.
한편 사우디 정부는 이번 보고서를 정면 부인했다. 사우디 외무부는 성명을 내고 "지도부에 관한 보고서의 부정적이고 거짓되고 인정할 수 없는 평가를 완전히 거부한다"며 "그 보고서는 부정확한 정보와 결론을 포함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또 "카슈끄지 암살은 혐오스러운 범죄로 왕국의 법과 가치에 대한 노골적인 위반"이라는 기존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