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생활을 고되게 하는 건 사실 훈련보다는 경계다. 모두가 잠든 새벽, 경계 근무를 서기 위해 두어 시간 남짓한 잠에서 깨어나 군복으로 갈아입을 때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무기를 챙기고 장교에게 신고를 마친 뒤 밖을 나서면 매서운 추위가 몸을 파고든다. 잠에서 덜 깬 몸으로 맞는 칼바람은 평소에 비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한참을 걸어야 도착하는 초소. 그곳에서 칠흑 같은 어둠과 맞서며 경계를 서는 두 시간은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암흑 속에서 억겁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앞선 과정을 역으로 반복해 생활관으로 복귀한다. 물론 경계를 섰다고 잠을 더 잘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사병들은 늘 잠이 부족하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고 군대에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 강원도 고성에서 발생한 '잠수복 귀순'을 두고도 논란이 뜨겁다. 민간인이 잠수복을 입고 6시간 동안 헤엄쳐 넘어온 사실이나 CCTV에 10번 포착되었는데도 8번을 놓친 사실, 상황을 파악한 지 31분이 지나서야 주요 관계자들에게 보고한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군 기강이 붕괴되었다는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군은 으레 책임자 엄벌과 재발 방지를 약속한다. 하지만 남는 건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마련된 불필요한 사열과 책임을 지고 보직해임 된 장교들의 빈자리들이다.
경계 실패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 군인들에 대한 처우는 어떤가? 우리 또래들이 첩첩산중과 망망대해에서 청춘을 가져다 바친 데에 따른 보상은 고작 월급 7만~8만원. 이번 정부 들어 병사들에 대한 처우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최저임금의 3분의 1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장교들은 사소한 실책에도 걸핏하면 옷을 벗고 부사관들은 열악한 처우에 한숨 짓는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군대가 사람을 불러다가 "뺑뺑이 돌린다"고 해서 논란이 인 적이 있다. 혹자는 품위를 지적했지만, 사병 출신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말이다. 명예와 권리는 결여된 채 의무만 남는 시간, 이제는 공공기관에서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군 생활이 '뺑이치는 시간'으로 여겨지는 건 당연한 결과다.
군인들이 나라를 지키게 하는 원동력은 애국심이다. 그 애국심은 국정교과서나 시민교육으로 강요한다고 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 나라가 지켜야 할 나라가 될 때, 그리고 그 나라를 지키는 자신이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을 때 애국심은 비로소 샘솟는다. '현실적 어려움'이라는 이유로 청춘을 착취당하고,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더라도 불의의 사건으로 옷을 벗어야 하는 현실에서 애국심이 자라날 공간은 없다. 그 자리엔 보상심리와 보신주의만이 잡초처럼 무성히 자랄 뿐이다.
귀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해이해진 군 기강을 질타하는 목소리는 어김없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사건은 매년 반복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군 기강을 논하기에 앞서 그 배경을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 경계병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방안을 찾든, 낡은 재래식 경계 시스템을 뒤바꾸든 말이다. 자부심을 잃은 군인들이 지킬 수 있는 나라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