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진도 백지화도 대통령 결정, 피해는 국민이..." 원전 주민들의 통곡

입력
2021.03.0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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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원전 지정됐다 해제된 영덕 석리마을
이주단지 약속받고 집 넘겼지만 '없던일로'
신한울 건설 재개 손꼽아 기다린 울진 주민들
착공 여부 기한만 연장되자..."희망고문이냐"

지난달 26일 오후 3시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리마을. 완연한 봄기운에 공기 좋고 바다 좋은 이곳에는 얼굴 잔뜩 찌푸린 사람들로 가득했다. 2012년 9월 마을 전체가 천지원자력발전소 건설 예정 구역으로 지정돼 매매는 물론 집수리도 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어둡다 못해 짜증기까지 섞인 주민들의 표정에는 또 이유가 있었다. 지난달 22일 주민들을 옥죄었던 원전 지정 고시가 해제되면서 이제는 살던 집을 비워줘야 하는 형편이 된 탓이다.


"살던 집까지 비워야 할 판"

이곳에서 만난 한 주민은 "마을이 새로 들어설 원전 부지에 포함되면서 집단이주 때까지 살기로 하고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 집과 땅을 넘겼다"며 "원전 건설이 없던 일로 되면서 마을 집단이주도 불투명해져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고 말했다. 이미 일부 주민들은 한수원으로부터 수 천만원의 임대료 청구서까지 받아 든 터다.



원전 예정부지 주민들이 정부의 탈원전정책으로 통곡하고 있다. 정부를 믿었지만, 정부가 약속한 개발 계획은 물거품이 됐고, 원전 예정지는 폐허가 되고 있다.

한수원은 영덕에 1,500㎿의 가압경수로형 원전 4기를 건설하는 정부 방침에 따라 2016년 부지로 지정된 영덕읍 석리와 노물리, 매정리, 축산면 경정리 일대 땅 324만㎡에 대한 토지보상에 들어갔다. 전체 예정부지의 18.95%에 달하는 291필지, 61만5,000㎡가 430억원에 팔렸다.

마을 전체가 원전 부지에 포함된 석리 128가구도 일부가 보상에 응했다. 돈을 받고 집과 땅을 한수원에 넘긴 주민 30여가구는 집단 이주할 주택단지가 제공될 때까지 살던 집에 머물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2017년 7월 문재인 정부가 천지 1·2호기 건설사업을 백지화하면서, 이주단지 건설 약속은 물거품이 됐다. 주민들이 "정부 말을 믿은 내가 바보"라며 땅을 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한수원 '안 나가려면 집세 내라'

주민들은 한수원에 "약속대로 집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참다못해 주민 24명이 한수원을 상대로 ‘이주대책 지위 확인 소송’을 내면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급기야 한수원은 2019년 9월 소송을 제기한 주민들만 솎아내 "집을 비우라"는 명도소송을 제기했고, 가구당 수천만원의 임대료까지 청구했다. 송사에 지친 주민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면서 현재 12가구만 남았다. 김영찬(65) 석리 이장은 “원전 예정지역으로 지정된 후 9년간 폭우 때 작은 배수로를 하나 내달라고 해도, 곧 사라질 동네라는 이유로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며 “원전 짓겠다고 한 사람도, 백지화한 인물도 다 대통령인데, 마을을 통째 뺏긴 우리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역경제가 원전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경북 울진도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최근 건설 여부를 놓고 4년을 끌던 신한울 3·4호기 공사계획 인가 기간을 2023년 말까지 2년 더 연장하면서다. 그렇잖아도 원전 건설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정부가 "사업재개 취지는 아니다"고 밝히자, 주민들은 "희망고문이 시작됐다"며 반발하고 있다.

오희열 울진군 범군민대책위원회 사무처장은 "한수원과 정부가 신한울 3·4호기를 착공하지 않고 질질 끌고 있다"며 "인가 기간 연장으로 오 갈 데 없는 주민들은 더 길어진, 헛된 꿈을 품고 살게 됐다"고 말했다.




원전 예정 지역경제는 '폭삭'

이미 울진은 도시 전체가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다. 원전이 몰려 있는 울진군 북면 부구리와 고목리 일대에는 원전 건설 근로자로 북적거리던 곳이지만, 눈을 씻고 봐도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주로 묵던 조립식 임대 숙소 10여곳은 폐가로 변해 있었다. 2017년 10월 정부의 신규 원전 백지화 발표 이후 외지서 온 일꾼들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빠져나갔다. 2,000여명이 이사나가면서 인구 5만명 선이 무너졌다. 취업률 95%로 전국에서 인재가 몰리던 원전 마이스터고는 올해 사상 처음 신입생 미달 사태를 겪었을 정도다.

신한울 원전 중단의 불똥은 멀리, 경남 창원으로도 튀었다. 원자로를 제작하는 두산중공업과 280여개의 협력업체가 밀집해 있는 곳이다. 두산중공업은 신한울 3·4호기 공정이 중단돼 관련 설비와 발전기 등 사전제작비 4,927억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원전 5기가 있는 경북 경주지역 주민들도 월성 원전 조기 폐쇄 논란에 이어 정치권의 삼중수소 누출 공방으로 지쳐가고 있다. 주민들은 끊이지 않는 논란에 피로감을 호소하며 지역 경제 침체를 우려하고 있다.

탈원전 정책에 따른 후폭풍은 경북도에 집중되고 있다. 국내 원전 24기 중 11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혁신원자력연구원, 중수로 해체기술원 조기 건설과 함께 원자력 안전 컨트롤타워인 '원자력안전위원회'를 유치하겠다는 방침이지만, 꺼져가는 원전의 불씨를 살리기엔 역부족이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경북은 원자력 최대 집적지여서 원전 백지화에 따른 충격이 엄청나다"며 "원전 인근 주민들이 더 고통을 겪지 않도록 철저한 피해 조사와 보상을 정부에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영덕·울진·경주= 김정혜 기자
창원= 이동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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