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친환경 바람 속에 유명 글로벌 기업들이 다투어 이른바 ‘RE100’을 도입하고 있지만 한국에선 제도적 허점 탓에 기업들의 RE100 달성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RE100(Renewable Energy 100%)은 신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력만 100% 사용해 제품을 생산하는 개념이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 기업들이 RE100 도입 추세를 따라가지 못할 경우 새로운 무역장벽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24일 업계와 정부에 따르면, 애플과 BMW, 구글, 월마트 등 280여 글로벌 기업들이 이미 RE100 참여를 선언했다. 미국(51개), 유럽(77개)에 이어, 아시아 기업(24개)들로 참여가 계속 확대되는 상황이다.
문제는 애플, BMW 등 적지 않은 글로벌 기업이 협력업체에까지 RE100 동참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사업 자체가 무산되는 결과까지 빈발하고 있다.
실제 BMW가 2018년 LG화학에 부품 납품 전제조건으로 RE100을 요구하면서 계약이 무산됐다. 같은 요구를 받은 삼성SDI는 국내 공장 생산물량을 신재생에너지 사용이 가능한 해외공장으로 옮겼다.
업계 관계자는 “애플이 지난해 반도체 납품물량을 놓고 SK하이닉스에 'RE100을 맞추지 못하면 대만 TSMC로 물량을 돌리겠다'고 압박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환경 캠페인으로 시작한 RE100이 지금은 국내 기업에 새로운 무역장벽이 됐다”고 전했다.
한국에선 작년초까지만 해도 RE100 선언 기업이 한 군데도 없었다. 국내 제조업이 쓰는 에너지 가운데 전력이 48%나 돼, 기업이 막대한 비용 부담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RE100 참여 흐름을 거부하기 어려워지자 작년 말부터 LG화학, SK하이닉스, SK텔레콤, 한화큐셀 등이 잇따라 RE100 참여를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의 의지와 무관하게, 국내에선 제도적 맹점 탓에 RE100 달성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업이 RE100을 달성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체 신재생에너지 생산시설을 갖추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비용 부담이 막대하다. 이에 현실적인 방법은 전력판매 공기업인 한국전력으로부터 신재생에너지를 이용해 생산한 전력을 구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재 불가능하다. 한전이 전력 생산 원천을 원자력, 화력, 태양광 등으로 구분해 팔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산업통상자원부가 올해 들어 한전이 아닌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로부터 기업들이 전력을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제3차 전력구매계약(PPA)’ 방안을 마련했고, 이달 중순에야 국회 상임위 법안소위를 통과한 상태다.
하지만 PPA는 전력판매 시장에서 한전 비중을 줄이는 결과를 불러오는 등 논란도 큰 사업이어서 도입 시기가 가늠되지 않는다.
기업들에게 RE100 달성을 위해 남은 방법은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를 구입하거나, 한전에서 파는 ‘녹색 프리미엄’ 요금제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REC는 한국남동발전 등 국내 발전공기업만 구매가 가능하다. 올해 제도가 개편돼 민간 기업도 REC 구매 길이 열렸지만, 시범사업 중으로 내년 초에나 본격 도입될 것으로 점쳐진다. 더욱이 REC는 산업용 전기요금보다 크게 비싸기도 하다.
남는 대안은 녹색 프리미엄 요금제이지만 이는 신재생에너지를 사용한다고 보기 어려워 기업들의 참여가 저조하다. 원자력, 화력 등으로 생산한 전기를 ‘웃돈(프리미엄)’을 주고 구매해 신재생에너지를 사용했다고 인증 받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달 8일 LG화학과 SK하이닉스 등을 대상으로 제1차 녹색 프리미엄 입찰이 이뤄졌지만, 전체 전력 공급량의 7% 밖에 팔리지 않았다.
업계 관계자는 “애플의 경우 RE100을 녹색 프리미엄으로 채우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며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녹색 프리미엄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 대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구입하는 걸 주저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