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곡 주먹도끼, 이 땅 구석기인들의 '지혜의 흔적'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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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7 09:00
16면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1> 전곡 구석기 유적: 시간여행 떠나기

고대의 유적으로 가는 길은 모두 시간여행길이겠지만 경기 연천군 전곡 구석기유적은 좀 더 특별한 느낌이 있다. 바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기 때문이다. 전곡유적은 적어도 30만 년 된 곳이니 한 세대를 30년이라고 치면 1만 세대 이전, 즉 까마득한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서울에서 3번 국도를 타고 북으로 한 시간 정도 가면 한탄강 다리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서 눈에 번쩍 띄는 우리나라 최초의 스테인리스 곡면건축물인 전곡선사박물관이 시야에 들어온다.

경기 연천군 전곡지역, 고고학여행이 시작되는 곳

박물관은 용암 단애면의 끝에 걸쳐서 다리처럼 만든 건물인데 이 박물관의 별명이 바로 ‘시간의 문’이다. 이 문, 즉 박물관 건물 밑을 지나서 언덕으로 오르면 널찍하게 전곡선사유적지가 펼쳐진다. 바로 1979년도 1차 발굴 이후에 바로 국가사적 268호로 지정된 구역이다. 약 24만 평이 지정돼 보존되고 있는데 아마 선사유적으로는 지정 구역이 가장 클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전곡에서 3번 국도를 따라 연천까지 이어지는 벌판이 모두 유적일 것이다. 다만 현재 지정된 구역 일대에서 가장 많은 석기유물들이 출토되었고 중심지역임은 틀림없다.

나의 고고학 여행이 전곡에서 시작되는 것은 내 고고학 학문 인생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40여년 동안 지구상 어디에 있어도 하루도 전곡리 유적이 내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다. 나의 고고학이 시작된 곳이고 아직도 진행 중인 곳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기행’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이 좀 어색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번엔 지난 40여년의 시간 여행, 그동안 발굴 조사와 전곡선사유적축제를 하면서 무수한 시간을 보냈던 그곳으로, 즉 '센티멘털 저니'로서 ‘전곡 유적 가는 길’이다.

전곡 지역은 우리 민족 역사의 흔적이 많고 삶의 애환도 많은 곳이다. 한탄강 다리 남쪽 끝에 38선이라고 새겨진 큰 비석이 서 있고 연합군 전투기념비가 그 옆에 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전곡은 북한 땅이었다. 40여년 전 발굴이 처음 시작될 때만 하더라도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었고, 군인들이 북적거리는 도시가 바로 전곡이었다. 발굴 인부 중에서도 포로가 된 공산군에서 전향한 사람들이 있었고 1986년 발굴 중에는 전쟁 중 매설된 대전차 지뢰가 발견되어 깜짝 놀라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전곡 지역은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민족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한탄강 다리의 동쪽에 있는 대전리성터는 신라가 당군을 격파하고 삼국통일을 완수한 매소성(買肖城)으로 비정하는 곳이다. 망국의 태자인 마의태자가 아버지 경순왕을 연천에 묻고 금강산으로 떠났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강화도에서 원산을 잇는 추가령지구대를 따라 선사시대나 고대로부터 한반도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으로서, 한반도 역사 속에서 문화의 교차로이자 남북의 힘이 부딪혔던 곳이다.

한탄강과 임진강변을 따라서 용암절벽에서 볼 수 있는 절리 현상은 기기묘묘하다. 용암은 철원의 북쪽 오늘날 휴전선 속에 있는 오리산에서 시작하여 강을 따라서 파주 화석정까지 흘러서 당시의 강바닥을 메워버린 것이다. 이후 강이 용암대지 위를 흐르면서 용암을 침식하여 한탄강과 임진강을 따라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절벽을 만들었다. 용암은 균열이 많아서 빠르게 수직으로 무너지지만 단애 위에 남은 전기 구석기시대의 퇴적층들은 침식을 덜 받아서 우리나라 다른 지역에 비해 오래된 유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최근 유네스코는 이 용암의 경관을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했다. 그만큼 귀하고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고고학의 역사를 바꾼 주먹도끼

전곡 구석기 유적이 유명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곳에서 발굴된 '아슐리안 주먹도끼'들 때문이다. 동아시아, 즉 인도의 동쪽에는 출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1978년에 전곡(리) 구석기 유적에서 처음으로 발견되면서 당시까지 지배적이던 세계 구석기 이론, 즉 미국 고고학자인 모비우스(H Movius) 교수가 말한 서양의 아슐리안 문화와 동아시아의 찍개(Chopper-Chopping Tool) 문화라는 2대 전통론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전곡리의 아슐리안 주먹도끼 발견은 세계 고고학계의 주요한 쟁점으로 부각됐고 일본에서는 과학잡지에 특별 대담을 마련할 정도로 큰 이슈가 됐다.

전곡선사박물관에 들어서면 정면에 보석처럼 전시된 전곡의 아슐리안 주먹도끼들이 관객을 맞이한다. 전곡 유적의 아이콘들이다. 그 뒤로 인류의 가장 오래된 모습인 키 작은 할머니 루시(Lucy)를 시작으로 인류 진화의 단계별로 아주 정교하게 복원된 인류 모형이 타원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세계 최고의 복원전문 조각가인 프랑스인 데인즈(E Daynes)의 작품으로, 세계에서 전곡선사박물관이 한자리에 가장 많은 컬렉션을 가지고 있다. 전시된 여러 단계의 원시인류 가운데 우리와 흡사한 모습이 처음 나타나는 호모 에렉투스가 바로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주인공이다.

왜 주먹도끼가 그렇게도 중요할까? 인류가 진화한다는 것은 두뇌 용적이 커진다는 것인데 이는 바로 생각이 깊어지는 증거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주먹도끼를 만드는 것은 도구제작기법이 1차원에서 3차원으로 소위 생각이 '점핑'했다고 볼 수 있다. 인류가 석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330만년 전이고 주먹도끼를 만들기 시작한 게 170만년 전 쯤이니 인류 도구사의 절반은 1차원적인 도구만 만들고 살았던 셈이다. 결국 주먹도끼를 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200만년 전 쯤에 아프리카에서 나와 유라시아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주먹도끼의 존재는 구석기인들의 지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요즈음에는 학자들도 주먹도끼를 만든 이유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1차원적인 작업으로 만든 찍개(초퍼·chopper) 같은 석기도 주먹도끼와 똑같은 작업을 할 수 있는데 ‘왜 그리 복잡하게 만들었을까?’라는 것이다. 아프리카나 유럽 지역에서는 주먹도끼가 일정하게 제작되는 것을 놓고 인류사에서 패션감각이 시작됐다고 보기도 했다. 근래 새롭게 제기되는 학설로는 구석기 시대 남성 심벌로서 결혼지참금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전 세계 어디든 구석기 시대 유물 중에서 예술품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이 주먹도끼일 것이다. 전곡박물관 입구에도 주먹도끼를 모티프로 하여 만든 임승오 작가의 거대한 주먹도끼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일본의 가짜 주먹도끼 사기극

주먹도끼도 흑역사가 있다. 일본의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라는 사이비 고고학자의 스캔들이다. 가짜 주먹도끼를 땅에 묻어놓은 뒤 고고학자들에게 발굴하게 해서 40만 년 전, 더 심하게는 70만 년 전의 것으로 발표했던 일이다. 1990년대에 일어난 이 사기사건은 20세기 초 영국의 필트다운인 가짜 고인류화석 사건 이후 최악의 고고학 사기사건으로 기록되며 전 세계 과학계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한반도에서 30만 년 전의 주먹도끼가 출토되는데 일본열도 구석기 연대는 고작 3만5,000년 전에 머물고 있으니 어떻게든 한국 역사를 이겨보겠다는 허황된 생각이 일본 과학의 부끄러운 역사를 만든 것이다.

시간의 문이라는 박물관 건물의 아래 통로를 지나서 뒷마당을 올라서게 되면 평탄하고 널찍한 유적공원이 펼쳐진다. 코로나19가 휩쓴 지난해를 제외하면 매년 5월 5일 선사축제가 열려 선사문화 체험으로 하루를 즐긴 곳이기도 하다. 평탄지를 돌아가는 길 동쪽 끝 지점에 위치한 고깔 모양 지붕의 발굴피트 전시관에서는 유적의 속살을 엿볼 수 있다. 7m 깊이 붉은 색조의 점토층은 바로 전곡유적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모나코 국왕인 알베르공도 주먹도끼와 이 황토층 단면을 보기 위해 전용 비행기를 타고 전곡을 방문한 적이 있다. 유적의 흙은 오늘날에도 불어오는 황사가 지난 수십만 년 동안 쌓인 것이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불어온 황사 속에 포함된 석영 입자, 일본에서 날아온 화산재, 우주 입자가 대기와 충돌하며 만들어진 우주선(Cosmic ray)의 흔적에 힘입어 황토층의 연대가 41만~57만년 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구석기인들도 협업을 했다

지금도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유적의 서쪽 지역에 위치한 토층전시관이다. 이곳에는 발굴구덩이 속에 직경 70㎝ 크기의 큰 강바위 하나가 붉은 점토층에 홀로 덩그라니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돌이 자연적으로 굴러올 수는 없기 때문에 분명 선사시대 사람들이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강으로부터 아주 힘들게 운반해 온 것이다. 중요한 점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협동하였다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증거라는 점이다. ‘왜 이곳으로 가져온 것일까?’

토층전시관에는 초대 전곡유적 발굴단장을 하셨던 삼불 김원용선생 기념전시실이 있다. 전곡 발굴의 역사뿐 아니라 한국고고학 1세대로서의 인생 여정도 엿볼 수 있다. 멀지 않은 곳에는 그분의 비석과 동상이 서 있다. 유해가 산골된 자리기도 하다. 고향이 이북이니 망향사를 부르며 유적을 지키는 신이 되신 셈이다. 이곳을 뒤로하고 좁은 비탈길을 내려와 한탄강변에 서면, 병풍처럼 펼쳐진 기묘한 용암절벽 아래 무심하게 흐르는 강물은 시간을 망각한 채로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기만 하다. 유적지 건너편 마을에서 우리를 강 건너게 해주던 그 처녀뱃사공은 지금쯤 할머니가 되어 어디에 사는지.

글·사진=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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