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뚫린 검증에 가해자 동정까지… 학폭 2차 가해 온상된 TV예능

입력
2021.02.22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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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즐거움을 줘야 할 TV 예능프로그램이 학교폭력(학폭) 등 2차 가해의 온상이 되고 있다. 제작진이 부실한 검증으로 불과 2~3년 전 성폭행 의혹으로 물의를 빚은 출연자를 방송에 내보내는가 하면 가해자에 대한 온정주의적 연출로 논란을 키우고 있어 제작 관행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분별한 가해자 서사가 반복되면 피해자의 고통을 극대화할 뿐 아니라 가해자에 자칫 면죄부를 쥐여주는 것으로 비쳐 인권 감수성을 더욱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방송 1~2주 전 출연자 홈페이지에 공개" 의견도

Mnet 고교생 랩 경연 프로그램 '고등래퍼'는 잇따른 출연자 부실 검증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2017년 시즌1에서 성매매 시도 의혹을 산 출연자가 중도에 하차한데 이어 지난 19일 첫 방송된 시즌4에서 성폭행 의혹으로 논란을 빚은 출연자가 하차하는 사례가 또 벌어졌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출연자 논란이 잦아지자 Mnet은 2018년 출연자 심의위원회를 꾸렸다. 출연자와 2~3차례 면담을 하고 때에 따라선 지원자 부모와 통화해 방송 출연 부적격 사유를 확인하는 나름의 거름망이다. 하지만 그 내부 시스템이 무용지물이 된 셈이다.

방송사의 구멍난 출연자 검증으로 익명의 시청자는 2차 피해를 호소했다. '고등래퍼' 시즌4 출연자 K씨를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한 A씨는 지난 20일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피해자로서 방송에서 그 친구를 보는 게 너무 무섭고 수치스럽다"고 했다. '고등래퍼' 시즌4 제작진은 "방송 시작 전 출연자 40명과 여러 차례 심도있는 미팅을 진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출연자 K씨 관련 이슈는 사전에 전해 듣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지원자 검증은 지원자 발언에 의존해서 이뤄지다 보니 그 한계가 분명하다. 그래서 외부 검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방송 1~2주 전 오디션 출연자를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온라인에서 평판 조회가 이뤄져 방송 후 2차 피해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지원자가 미성년일 경우 출신 학교에서 한 번 더 평판을 확인해 검증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예능 제작 관계자는 "지원자가 '학교에서 학폭위가 열릴 만한 수위의 소동이 있었다' 고 말을 하면 학교에 가 확인할 수 있겠지만, 지원자가 '전혀 문제 없었다'고 하는데 학교에 찾아가 뒤적뒤적하는 건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난처해했다.




"학폭 사후 대처 미흡" 인권 감수성 사각

방송의 가해자 중심 서사는 예능을 인권 감수성 사각지대로 만들고 있다. TV조선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 '미스트롯' 시즌2 제작진은 학폭을 인정하고 사과한 진달래의 하차 과정을 지난 4일 방송에서 부적절하게 다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방송에서 진달래는 펑펑 눈물을 쏟은 뒤 "어차피 (경연을)해도 통편집이고 다른 참가자들한테 피해가 가는 거면 그만하겠다"고 말했다. 피해자나 자신의 잘못에 대한 사과는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진달래는 방송 닷새 전 SNS에 직접 글을 올려 "학창시절 잘못된 행동으로 상처받은 피해자분께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사과했다. 그런데 이 방송만 보면 진달래는 학폭 의혹으로 억울하게 프로그램에서 빠지는 것처럼 비쳐진다. 방송에선 "언니가 더 힘들지"라며 동료 출연자가 진달래를 위로하고, 화면 왼쪽 상단엔 '진달래 눈물의 하차'란 고지가 떴다. 정석희 방송평론가는 "미디어는 피해자가 분명히 존재할 때 학폭 출연자의 사후 대처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한데 이렇게 반성은 없고 위로만 하다 끝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출연자가 사회적 물의를 빚어 프로그램에서 하차할 땐 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않고 통편집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미스트롯' 시즌2 방송에선 진달래의 하차 과정이 2분여 동안 방송됐다. 시청자 게시판엔 '학폭 가해자가 피해자처럼 울고 포옹하고 토닥토닥이며 감싸줘 너무 불편했고 불쾌했다'(최**) 등의 글이 여럿 올라왔다.

배구선수인 이재영·다영 자매의 학폭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과 E채널 '노는 언니' 등은 두 자매가 나오는 방송의 다시보기 서비스를 최근 중단했다. 그간 방송사들은 출연자 학폭 논란이 불거지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흔적 지우기에만 급급했다. 공희정 방송평론가는 "시청자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학폭 등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키우기 위해 가해자가 방송에 하차하거나 그를 편집할 때 제작진이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를 방송을 통해 고지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다.

양승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