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를 뒤흔드는 강력한 폭발력을 자랑하거나 이슈를 몰고 다닌 선수들은 많다. 하지만 이만큼 꾸준하고 묵묵하게 자기 몫을 해내는 선수는 드물다. V리그 네 시즌째를 맞는 펠리페 알톤 반데로(33ㆍOK금융그룹) 얘기다.
펠리페는 21일 경기 의정부체육관에서 열린 2020~21 V리그 KB손해보험과 경기에서 41득점에 공격성공률 59.6%를 찍으며 팀의 3-2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팀의 주전 레프트가 모두 빠진 상태에서 공격은 펠리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이날 공격 점유율은 54.8%에 달했다.
올 시즌 1~3라운드까지 공격성공률 50.8%로 꾸준했는데 4라운드 들어 93득점(47.9%)으로 주춤했다. 하지만 5라운드에서 반전(128득점ㆍ51.3%)에 성공했고 6라운드에서 리그 막판 물오른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석진욱 감독도 “펠리페가 팀의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있다”라며 높게 평가했다. 석 감독은 “펠리페는 경기를 앞두고 확실한 자기 루틴을 행하는 성실한 선수다. 코치진이 아예 (펠리페의 루틴을) 건드리지 않는다”면서 “국내 선수들에게도 ‘펠리페를 보고 배워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펠리페는 올 시즌 OK금융그룹의 대체 외국인 선수로 합류하면서 ‘장수 외국인 선수’ 반열에 올랐다. V리그에서 4시즌을 보낸 외국인 선수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긴 가빈과 안젤코, 가스파리니와 펠리페까지 4명(산체스 19~20시즌 제외)뿐이다. 펠리페가 다음 시즌 어느 팀이든 계약에 성공하면 ‘최장수 외인’ 기록을 세운다.
한국전력 시절(2017~18)을 제외하면 세 번이나 각각 다른 팀에서 대체 외국인 선수로 뛰는 바람에 팬들에게는 ‘대체 전문’ 혹은 '저니맨'이란 인식이 강하지만, 사실 그의 성적을 놓고 보면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다. 통산 득점이 외국인 선수 중에 5위고 공격 성공률도 49.7%로 높다. V리그 첫 시즌(2017~18ㆍ47.2%)을 제외하면 모두 51% 안팎으로 꾸준하다.
그의 성실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지표는 ‘디그’다. 외국인 선수들은 대개 공격에 집중하기 때문에 수비에는 다소 약점을 보이거나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펠리페는 그러나 통산 681개의 디그를 성공시키며 역대 외국인들 가운데 단연 1위다. 2위 안젤코(532개)보다 압도적이다. 세트당 평균 디그를 봐도 1.357개로 역시 역대 1위다.
무엇보다 특별히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거나 부정적인 이슈를 생산한 적이 없었던 점도 높게 평가할 만하다. 지난 21일 경기 의정부체육관에서 열린 KB손해보험과 경기에서 상대 외국인 선수 케이타와 잠시 언쟁을 벌이긴 했지만 경기 후에는 “서로 이기려는 마음이 크다 보니 강한 표현이 나온 것이다. 이미 지난 일이다. 지금은 케이타에게 미안하다”라고 털어버렸다.
지난 시즌엔 국내에 코로나19가 급격히 번지면서 몇몇 외국인 선수는 이를 핑계로 계약을 해지하고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펠리페는 “배구에만 집중하겠다”라며 가족들을 브라질로 귀국시키고 리그가 종료될 때까지 팀을 지켰다. 또 경기가 잘 풀릴 때 유독 얼굴이 붉게 상기되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는 "펠리페 얼굴이 빨개져야 이긴다"는 얘기도 나온다.
꾸준함의 비결에 대해 펠리페는 '꾸준한 웨이트'를 들었다. 그는 “배구는 파워나 스피드가 동시에 나와야 하는 스포츠”라며 “이젠 나이(만 33세)가 적지 않다. 젊은 선수들과 겨루려면 그렇게 (웨이트) 운동을 해야 한다”라며 웃었다.
다만 지난 네 시즌 동안 아직 포스트시즌을 치르지 못한 점은 아쉽다. 지난 시즌에는 우리카드와 함께 정규리그 1위에 올랐지만 코로나19 여파로 포스트시즌이 열리지 않았다. 펠리페는 “팀간 순위가 촘촘하다. 정규리그가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가 보려고 한다”라고 '봄배구' 열망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