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장 울리는 '지·화·정' 리스크, 첨단산업 '나비효과' 부른다

입력
2021.02.2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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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그간 미뤄뒀던 수요가 폭발하며 이른바 '빅사이클'에 접어들 거란 장밋빛 전망이 쏟아지던 반도체 산업이 예상 못한 악재에 혼돈 속에 빠졌다. 이미 심해진 공급난에 더해, 최근 세계 곳곳의 자연재해까지 덮치면서 각국 반도체 공장이 문을 닫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지면서다.

반도체 공장의 잇따른 셧다운은 당장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을 심화시키는 걸 넘어, 글로벌 첨단산업 전반에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올 것으로 우려된다.

'지화정' 리스크에 반도체 공장 10곳 셧다운

21일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세계 반도체 산업은 이른바 '지(지진)·화재(화)·정(정전)' 리스크에 망연자실하고 있다.

통상 반도체 회사는 연중 1초도 쉬지 않고 공장을 돌린다. 반도체는 수백 단계의 공정을 거치는데, 가동을 멈춘 공장을 다시 최적 상태로 돌리는데 길게는 몇 달이 필요해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기 때문이다. 공장이 멈추면 필연적으로 '공급 공백' 사태가 뒤따르는 이유다. 반도체 부품을 기다리는 제조사는 곧바로 생산 차질로 이어진다.

과거에도 반도체 공장을 멈춰 세우는 지·화·정 리스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요즘처럼 한꺼번에 겹쳐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최근 4개월 동안 어림잡아 10곳 안팎(미국, 대만, 일본 등)의 반도체 공장이 지·화·정 리스크로 생산라인 가동을 멈췄다.


1분기 자동차 100만대 차질 전망

최근 반도체 공급 공백이 가장 극심한 분야는 자동차다. 지난해 말부터 자동차 수요가 서서히 살아나는 상황에서 차량용 반도체 공장이 잇따라 셧다운되며 부품난이 극심해졌다.

지난 16일부터 미국 텍사스 오스틴시의 대형 반도체 공장 3곳이 한파로 전력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문을 닫았다. 삼성전자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와 글로벌 차량용 반도체 회사 인피니언, NXP다. 인피니언과 NXP는 차 반도체 분야 세계 1,2위 회사다. 삼성전자도 미국 공장(주로 5G칩 등 첨단 반도체 생산) 일부 라인에선 차량용 반도체를 위탁 생산한다.

미국뿐 아니다. 세계 3위 차량용 반도체 회사 일본의 '르네사스'는 이달 15일 회사의 유일한 12인치 생산라인 가동을 멈췄다. 인근 바다에서 진도 7.3 강진이 발생한 탓이다.

지난달엔 세계 3위 파운드리인 대만의 UMC 공장 2곳이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가동을 중단했다. 8인치 생산설비를 갖춘 이 공장에선 주로 차량용 반도체가 생산된다. 지난해 10월 일본 오디오 반도체 회사인 AKM 공장이 화재로 문을 닫았는데, 공장을 다시 복구하는데 1년 가까이 걸릴 거란 예상이 나오면서 일본 완성차 업체들은 비상이 걸렸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은 "올해 1분기에만 100만대 가량이 생산 차질을 빚을 것"으로 내다봤다.

노트북·스마트폰 부품도 차질 빚나

반도체 공급 부족은 전방위로 번지고 있다. 만들 수 있는 반도체 총량이 정해져 있어 자동차 칩 공급을 늘리면 다른 쪽은 줄여야 한다.

최근엔 스마트폰, TV 등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인 전력반도체(PMIC), 디스플레이 구동칩(DDI) 등의 품귀 현상이 심각하다. 미국 애플이 최근 "맥북과 아이패드, 아이폰12 프로 모두 공급 부족 상태"라고 토로했을 정도다. 이에 자동차 칩 수급에 숨통이 트일 것으로 예상되는 하반기부턴 가전용 반도체 품귀가 심각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는 'TSMC 파장'도 적잖을 것으로 본다. TSMC는 이르면 5월부터 자동차 칩 생산량(현재 전체의 약 3%)을 늘리기 위해 12인치 공장에서 생산되는 55nm(나노미터) 제품의 15% 가량을 자동차 칩에 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과 미국 자동차 회사들의 읍소에 따른 것이다.

이 라인에선 LCD용 DDI 등 저가 전자제품 부품이 만들어진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PMIC, DDI 부품 부족으로 1분기말부터 노트북과 저가 스마트폰 생산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D램 주력 삼전·하이닉스는 "전망 좋다"

반면 고가 스마트폰 등에 들어가는 첨단 공정 반도체는 사정이 다르다. 이들은 자동차 칩보다 수익성이 좋다 보니 TSMC나 삼성전자 같은 업계 상위 파운드리들도 물량을 줄이지 않는다. 프리미엄 제품 생산에는 최근의 자연재해가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란 얘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업전망도 비교적 밝다. 이들은 메모리반도체(D램)가 주력인데, 최근 D램 가격(최근 한달간 14% 상승)은 가파르게 뛰고 있다. 더구나 삼성디스플레이의 DDI를 삼성전자가 생산하기 때문에 DDI 품귀난에 따른 반사이익을 삼성전자가 볼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파운드리 수요가 급증하는 점도 삼성전자엔 호재다. 노 센터장은 "최근 반도체 주가가 많이 뛰면서 조정을 받긴 했지만 올해 이들 두 회사의 실적 전망은 상당히 좋다"며 "반도체 수요가 부족하면 모르겠지만 공급 부족 사태는 오히려 이들 회사에 기회다"고 말했다.

김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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