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 사이트에서 드라마나 영화 소개 글을 보는 것은 나의 소소한 즐거움 중에 하나다. 보통 로그 라인이라고 부르는 한 두 문장으로 요약된 소개 글을 통해서, 만든 사람들이 작품의 핵심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게 재밌다. 예를 들어 두 번째 시즌을 갓 시작한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 소개 글은 이렇다. "채워질 수 없는 일그러진 욕망으로 집값 1번지, 교육 1번지에서 벌이는 서스펜스 복수극! 자식을 지키기 위해 악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여자들의 연대와 복수를 그린 이야기!" 원문에 느낌표가 들어가 있는데, 시청자들은 이 느낌표야말로 드라마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문장부호임을 알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핵심을 말해주려다가 작품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꽤 많다. 웨이브에서 시청 가능한 영국 BBC 드라마 '노멀 피플'이 그런 경우다.
"부유한 변호사 집안이지만 폭력 속에 자란 여자와 블루칼라 미혼모 가정에서 자랐지만, 성적, 성격, 인물을 갖춘 남자가 서로의 비틀어진 마음을 토닥여주며 사랑하게 되는 내용을 담은 드라마." 이 소개글이 이 작품에 대해 말해주는 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려주지 않으면서 남자는 완벽한 인물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이상한 내용까지 들어가 있다. 인성도 아니고 성격을 갖추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이런 의문점은 밀어두고 다시 읽어보면, 적어도 하나는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성과 남성의 사회계급이 다르다는 것. '부유한'의 대구로 '블루칼라'를 배치한 구도는 이상하지만, 아무튼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메리앤(데이지 에드가 존스)과 코넬(폴 메스칼)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닌다. 두 사람 다 성적이 좋은 편이지만, 학교 안에서의 위치는 전혀 다르다. 코넬이 조용한 성품임에도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은 반면, 냉소적이고 사회성이 없는 메리앤은 친구가 없다. 코넬의 엄마가 메리앤의 집에서 청소 일을 하고, 코넬이 엄마를 차로 데리러 오곤 하므로 두 사람은 가끔 메리앤의 집에서 마주친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만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라나 외톨이인 여자주인공과, 형편이 어렵지만 엄마의 따뜻한 지지를 받으며 자라나 무난하게 학교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남자주인공이 서로에게 끌리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는 이유는 수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서로 닮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비밀과 결핍이 있고, 그래서 외롭다. 메리앤은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겪었고, 그 폭력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망가뜨렸다. 코넬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고등학교라는 사회 안에서의 역할과 위치는 이 두 사람이 제대로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일을 방해한다. 한 차례 상실을 겪은 후, 메리앤과 코넬은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바뀐 세계에서 둘의 권력 관계는 역전되며, 몇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계속 변화한다.
이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원작을 떼어 놓을 수는 없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젊은 세대가 겪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아름답게 그려내면서도 계급과 권력 안에서 감정과 관계가 변화하는 순간을 명민하게 포착해낸 소설 '노멀 피플'은 아일랜드의 1991년생 작가 샐리 루니가 썼다.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27세에 세계적 문학상인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정보와 함께 '밀레니얼 세대의 샐린저'라는 유명한 별명이 등장한다. 영상 문법에 익숙한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과 그 한중간에 있는 샐리 루니를 생각할 때, 그가 드라마의 과정에서 극본에 직접 참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진다.
소설 원작이 있는 드라마로서 '노멀 피플'의 흥미로운 점은 각색이 되었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한된 공간에서 시간순으로 진행되며 사건보다는 감정을 따라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영상화를 위해 원작의 일부를 떼어내거나 선택해 조립할 필요가 적기도 했겠지만, 드라마를 위해 새로 만들어진 장면 자체가 거의 없기도 하다. 한 권의 장편 소설이 총 400여분 분량의 영상으로 그대로 옮겨진 것이다. '그대로'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소설 속 모든 장면은 드라마에 충실하게 재현되며, 샐리 루니의 섬세한 감정 묘사는 두 배우의 뛰어난 연기를 만나 살아 움직인다.
나에게 소설 '노멀 피플'과 드라마 '노멀 피플'은 같은 작품으로 보인다. 소설 속에 묘사된 인물이 독자로서 상상한 모습과 비슷하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보고 있는 느낌이라는 의미다. 소설의 장점은 그대로 드라마의 장점이 되며, 소설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드라마에서도 느껴진다. 이 소설을 좋아한 사람이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기는 어렵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소설이어야 하는 이유와 드라마여야 하는 이유 모두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의 이야기일 수 있고, 그렇게 쓸 수 있다는 것. 샐리 루니의 천재성은 오히려 여기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노멀 피플'을 보면서 정말 오랜만에,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감정이 화면 속에 그려지는 모습을 보며 물리적으로 가슴이 아팠다. 한 사람이 육체와 정신 모두의 의미에서 벌거벗은 나를 받아들여 줄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경험은 인생에서 매우 드문 것이다. 누군가는 평생 겪지 못할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장르는 이성애 로맨스 판타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소개 글에서 "성적, 성격, 인물을 갖춘 남자"로 묘사되는 코넬의 존재가 이 작품을 더욱 그렇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코넬은 21세기를 사는 밀레니얼 이성애자 여성이 연애의 상대를 생각할 때 이상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장점을 고루 갖춘 인물이다. 하지만 샐리 루니는 아름다운 육체와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췄지만 이를 결코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지향하고 날마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 남자를, 일찌감치 복잡한 내면을 드러낸 여성의 구원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코넬이 고향 친구의 죽음 이후 깊은 우울에 빠져있다가 상담을 받는 장면이 이 작품 전체를 이해하고 또 현실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무겁고 버거운 감정을 소화하지 못하고 자신을 작은 존재로 보며 끝내 완전히 솔직해지기를 두려워하는 코넬을, 메리앤이 구한다. 메리앤이 교환학생으로 스웨덴으로 떠나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영상통화 화면 너머로나마 코넬의 곁에 있어 주는 장면은, 밀레니얼 세대부터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의 교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장을 통하지 않고도 두 사람의 구체적인 표정과 마음을 마주 보게 되는 장면이기도 하기 때문에 소설로 이 과정을 따라간 독자라고 해도, 드라마의 시청자가 되어 이들의 말 없는 소통을 지켜보는 경험을 꼭 해보았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노멀 피플'의 연관 검색으로 맨 위에 뜨는 '노멀 피플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이 지나가는 시간 동안 메리앤과 코넬은 보편에 가까운, 평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무언가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그런 경험을 주었다. 결말에 이르러 둘은 서로가 구원하고 또 변화시켜 준 평범한 한 사람이 되어서, 처음으로 서로가 없는 세계에 살기로 한다. 완벽하게 닫힌 사랑 이야기를 원했다면 불만스러운 결말일 수 있지만, 내게는 최근에 본 어떤 작품보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결말이었다. 어떤 이야기는 시작하면서 끝난다. '노멀 피플' 또한 그런 이야기이다. 서로를 통해 성장하고 변화한 내가 다시 이전의 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듯이, 어떤 세계가 열리면서 닫힐 수밖에 없는 세계가 있고, 그런 세계에서는 열린 결말이야말로 완벽히 닫힌 결말일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요약하기란 정말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서로의 비틀어진 마음을 토닥여주며 사랑하게 되는 내용"은 조금 너무한 요약이다. 그러니 건너뛸 수도 요약할 수도 없는 이 세대의 성장과 변화, 관계가 보고 싶다면, 이런 불안하고 위태로운 세상에서도 당연하게도 사랑하고 누군가와 관계 맺으며 성장하는 지금의 젊은 세대를 보고 싶다면, 역시 이 드라마를 직접 보는 게 좋겠다.
윤이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