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책임자로서 시스템을 완벽히 구축하고 정상화하겠다.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쇄신하겠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약 2년 전 조재범 전 쇼트트랙 대표팀 코치의 성폭행 혐의를 비롯해 체육계에서 잇따른 미투 파문이 일자, 대책을 약속하며 내놓은 약속이다. 그러나 이듬해에 트라이애슬론 고 최숙현 선수 사태가 터졌고, 이후에도 관행적으로 작고 큰 폭력사태가 체육계 내부에서 이어졌다. 대한체육회가 이 회장의 약속과 달리 구조적 쇄신보다는 미봉책을 선택한 데 따른 결과라는 비판이 쏟아졌고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최근 배구계 학교 폭력 문제가 번지자 대한체육회는 그 불똥이 다시 튈까 전전긍긍하면서 체육회와는 무관한 일이라며 선을 그으려 하고 있다. 체육회 관계자는 17일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마련한 국가대표 선발 제한 등을 중심으로 체육계 폭력 근절을 위해 노력하겠다”며 “다만 이번 배구사태는 지금 여건과 다른 10여 년 전 학교 내에서 발생한 일로, 체육회에서 대책을 내놓을 사안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체육계 일각에선 엘리트 체육 중심을 고집하는 그간 체육회의 행보와 이번 배구계 사태가 무관치 않다는 반응이 나온다. 체육회가 반복되는 선수 폭력 사건을 극소수 선수의 일탈로 취급하며 조직적으로 은폐한 종목 단체 퇴출, 복수지도자 운영 체계 구축, 국가대표 선수촌 내 신고ㆍ상담센터 설치 등의 미시적 처방에 그치며 근본적인 해결을 외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민관합동으로 마련한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혁신위원회가 내놓은 권고안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체육회 내 기득권층인 엘리트 체육인 보호를 위해서라는 지적이 높다. 혁신위는 2019년 빙상계 파문을 계기로 7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스포츠 체계 전환을 위한 권고문’을 마련, 체육계 폭력사태를 “개인의 일탈이 아닌 체육계 전반의 구조적 문제”라고 진단했다. 성적 지상주의를 위해 코치진과 학교, 프로구단이 각종 부조리의 방패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혁신위는 기존 엘리트 육성시스템 전면 혁신을 위해 체육회에서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분리 △전국소년체육대회 구조개편 △주중대회 개최 금지 등을 권고했다.
당시 스포츠혁신위원장이었던 문경란 경찰청 인권위원장은 “체육회는 여전히 폐쇄적이고 온정주의를 중시하는 기득권층으로 가득해 인권존중을 위한 쇄신이 나올 수가 없다”며 “시대가 변한 만큼 일부 선수의 성적 향상보다는 교육의 기능을 높이고, 국민 대다수의 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체육회를 관리 감독하는 문체부 책임도 적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부터 3차례나 체육 분야 부조리 근절을 지시했지만, 사실상 체육회 등의 반발에 밀려 제대로 정책을 펴지 못하고 있다. 혁신위에서 요구해 지난해 8월 문을 연 스포츠윤리센터조차 채용비리, 직원간 갑질ㆍ폭언 의혹 등에 휩싸여 잡음만 가득하다. 혁신위에서 활동한 한 위원은 “권고문은 문체부를 중심으로 5개 유관 부처에서 스포츠 개혁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함께 마련해 체육회 등에서 이행하도록 한 방안”이라며 “개혁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안 하는 것이 아니고, 정부, 국회조차 체육계 기득권층과 연관돼 있어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황희 문체부 장관은 17일 서울 서대문구 스포츠윤리센터를 찾아 “센터가 체육인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꼼꼼히 살펴보겠다. 스포츠인들이 센터에 안심하고 신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학폭 논란과 관련해 문체부는 다음주쯤 재발방지 대책과 함께 종합 가이드라인을 발표할 계획이다. 황 장관은 “여러 계층의 이야기를 듣고 (스포츠 폭력 사건과 관련한) 종합적인 원칙이나 기준, 가이드라인을 늦어도 다음주 정도에는 마련하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