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트 매력이요? 싸이월드 레트로 그 이상이죠"

입력
2021.02.1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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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싸이월드 미니홈피는 하나의 세계였다. 가로 400픽셀 세로 200픽셀의 공간 안에 도트로 이뤄진 2.25등신 미니미만으로도 온갖 희로애락을 표현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다양한 SNS들이 생겨나며 자연스레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지만, 여전히 추억의 한 페이지는 이 단순한 도트와 픽셀이 장식하고 있었다.

그렇게 과거의 영광으로만 끝난 줄 알았던 도트들이 다시금 부활을 선언하고 나섰다. 싸이월드는 ‘싸이월드2’라는 이름으로 오는 3월 기존 서비스 재개를 선언했고 도트 그래픽의 대표주자였던 게임 ‘바람의 나라’는 그 시절 PC온라인 게임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모바일 버전으로 지난해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이 같은 도트의 부활에 누구보다 쾌재를 부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첫 웹툰 ‘데미지 오버 타임’과 최근 출간한 만화 ‘나의 살던 고향은’까지, ‘도트’로만 만화를 그려온 선우훈(32) 작가다. 지난 8일 서울 동대문구 작업실에서 만난 선우 작가는 "싸이월드2의 도트 작업을 맡고 싶다”며 손을 들었다.

선우 작가가 자처하고 나선 데는 이유가 있다. 만화뿐 아니라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영역에서 도트의 역할을 모색해온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2017년 서울시립미술관의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전을 시작으로 2018 광주 비엔날레, 2019 아시아 현대미술전에 도트 작업물로 참여했다. 오는 4월까지 전개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88서울올림픽전에도 선우 작가의 작품이 전시 중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운영하던 문구점에서 하던 8비트 게임이 출발 같아요. 만화가를 꿈꾸기는 했지만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하며 생각을 접었죠. (선우 작가는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그러다 군대에 있을 때 업무용 컴퓨터에 깔린 그림판으로 (도트) 그림을 그렸는데, 여기서 재미가 붙었죠. 졸업 후 IT스타트업에 다니다 문득 도트로도 만화를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렇게 도트 덕에 만화가가 됐고, 미술 전시까지 하게 됐네요.”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촉발된 관심이었지만, 표현하고자 한 주제에도 도트라는 방식은 딱 들어맞았다. “픽셀 세계를 내려다보는 쿼터뷰(대각선 방향에서 내려다보는 시점) 자체가 소실점이 없는 신의 눈을 전제해요.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당연한가’라는 질문을 탐구한 데뷔작 ‘데미지 오버 타임’의 주제와 일맥상통했죠.”

선우 작가의 성장기를 그린 이번 만화 ‘나의 살던 고향은’에도 도트는 제격이었다. “지방 도시의 재혼 가정에서 자란 저의 사적이고 특수한 경험을 보편의 이야기로 만드는 데 도트가 큰 역할을 한 것 같아요. 그 시절을 거쳐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트’에 대한 향수가 있으니까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전시중인 ‘모듈러라이즈드’나 2017년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전에서 선보인 ‘가장 평면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 역시 픽셀과 도트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를 재고찰한 작품이다. 청와대 앞이나 광화문 같은 집회 공간, 그 곳을 빽빽하게 메운 사람들, 여기에 근래 한국사회를 휩쓴 메르스, 세월호, 탄핵, 여성혐오 등의 이슈가 모두 도트로 구현됐다. 작품 하나당 포토샵으로 가로 1,030개, 세로 1만 8,000개의 점을 찍었다. 선우 작가에게 ‘도트’는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첨예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도구다.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자유가 허락되죠. 지나치게 세밀하고 구체적인 그림들은 오히려 상상력의 개입을 차단하니까요. 단순한 레트로 유행을 뛰어넘어, 새로운 화두를 도트를 통해 만들어나가고 싶어요.”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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