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 석방 촉구를 계기로 반(反)정부 투쟁으로 비화한 러시아 시민사회 집회가 ‘소프트 저항’으로 변모하고 있다. 경찰의 강경 진압에 맞서 마찰을 최소화하고 시위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평화 시위’ 기조가 뚜렷해진 것이다. 리본과 휴대폰 불빛 등을 동원해 과격 충돌을 불사하지 않고도 저항의 의미를 살렸다는 평가다.
14일(현지시간) 외신에 따르면 이날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시위 현장에는 흰색 리본을 손에 든 300여명의 여성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리본을 연결해 긴 인간 띠를 만들었다. 나발니 등 수감된 정치사범들을 향한 연대의 표시다. 시위에 참가한 한 대학생은 영국 일간 가디언에 “인간 띠에는 폭력에 반대하고 사랑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면서 “우리는 러시아의 자유와 정의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제2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여성 100여명이 보스크레센스카야 나베레쥬나야 거리에 있는 정치 탄압 희생자 추모비 근처에 모여 인간 띠를 형성하고 나발니의 석방을 요구했다.
밤에는 도심 곳곳에서 휴대폰 불빛이 밝게 빛났다. 나발니 지지자들은 저마다 집 마당이나 거리에 나와 휴대폰 손전등을 비추며 시위를 이어갔다. 나발니가 2일 열린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 받을 때 아내 율리아에게 내보인 손하트에서 영감을 얻은 몇몇 시위자들은 불빛으로 하트 모양을 그리기도 했다.
러시아 시민들의 평화 시위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했다. 로이터통신은 “동부 이르쿠츠크와 서부 노보시비르스크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전역에서 촛불과 손전등이 반짝였다”고 표현했다. 나발니의 지역본부 네트워크 팀장 레오니트 볼코프도 SNS에 올린 글에서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이유”라며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나발니 측은 지난 몇 주간 반정부 시위에서 야권 인사 등이 대거 연행돼 투쟁 동력 저하가 우려되자 대규모 집회를 봄ㆍ여름으로 미뤘다. 대신 이날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새롭고 안전한 형태의 시위를 전개하라고 지지자들에게 당부했다. 이날 시위가 무력 충돌로 번진 과거와 달리 비폭력으로 진행된 이유다. 거리 행진도 없었고, 야간 집회 역시 15분 정도 이어지다 시위자들이 자진 해산했다.
하지만 러시아 당국이 시위 자체를 불허한 만큼, 10여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우리는 누구와도 장난치지 않을 것”이라며 “어떤 형태의 시위도 법을 위반하면 반드시 처벌하겠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