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수면 밑에서 벌어졌던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의 상당수는 결국 사실로 밝혀졌다. 이 사건 1심 법원의 결론은 “청와대와 환경부가 원하는 인사를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직에 꽂아 넣기 위해 전 정권 때 임명된 임원들을 사표 제출 압박으로 쫓아냈고, 후임으로 내정된 사람에 대해선 ‘물밑 지원’에 나섰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재판부는 “국민들에게 공공기관 임원 채용 과정에 대한 깊은 불신을 야기한 사건”이라는 질타도 쏟아냈다.
9일 법원은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을 ‘범행 주도자’로 못 박았다. 공소사실 상당수도 유죄로 판단됐다. 그 결과는 ‘징역 2년 6월ㆍ법정구속’이라는 철퇴였다. 함께 기소된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도 ‘일괄 사표 종용’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주요 범행을 공모한 사실이 인정돼 유죄 판결(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두 사람이 환경부 공무원 등 실무 담당자들을 상대로 부당한 지시를 했다는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도 “법리적으로만 죄가 안 될 뿐, 인사권 남용이나 위법한 지시는 맞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김 전 장관의 직권남용 혐의 중 유죄가 선고된 부분은 우선 ‘일괄 사표 제출 종용’이다. 그는 2017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 사이 박근혜 정부 때 임명된 임원들 15명에게 사표를 내라고 거듭 주문했고, 실제로 13명이 사의를 밝혔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재판부는 환경부로부터 ‘다음 자리’를 약속받은 이모 국립생태원장을 뺀 나머지 12명의 사표 제출에 대해 “정당한 해임 사유 없이 소위 ‘물갈이’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신 전 비서관의 공모 의혹에 대해선 “의심스런 정황은 있으나 명백한 증거는 없다”면서 무죄로 판결했다
김 전 장관과 신 전 비서관이 ‘물갈이’를 끝낸 임원의 후임자를 뽑는 과정에서, 미리 점찍어 둔 특정 인사에게 물밑 도움을 준 혐의(직권남용ㆍ업무방해)도 대부분 유죄로 판단됐다. 내정된 인물을 합격시키기 위해 내부 자료를 몰래 제공하도록 한 데 대해 재판부는 “법리상 죄를 묻긴 어려워도 인사권 남용”이라고 지적했다. 또, 임원추천위원회(임추위)에 참여하는 환경부 실ㆍ국장급 공무원들에게 전형 과정에서 내정자한테 높은 점수를 주도록 ‘현장 지원’을 지시했다는 의혹도 ‘사실이자 위법’으로 인정했다.
환경공단 상임감사 선발과정에서 빚어진 애꿎은 지원자들의 ‘무더기 탈락’ 사태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김 전 장관 등에게 책임을 물었다. 청와대가 내정한 언론인 출신 박모씨가 서류심사에 탈락하자, 면접 단계에 올라간 다른 후보 7명 모두를 ‘불합격’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린 건 ‘직권남용ㆍ업무방해죄’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다만 탈락한 박씨를 위해 A에너지개발 대표이사 자리까지 마련해 준 것과 관련해선, “이 사안은 ‘부당한 행위’이긴 하지만, 환경부 장관의 지휘ㆍ감독권하에 있는 일이라 직권남용죄를 물을 순 없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박씨 서류 탈락’을 이유로 환경부 공무원들에게 불이익을 준 행위는 ‘일부 유죄, 일부 무죄’ 판단이 나왔다. 김 전 장관이 황모 환경부 환경경제정책관을 문책성 전보시킨 혐의엔 직권남용죄가 인정된 반면, 신 전 비서관이 김모 환경부 운영지원과장에게 소명서를 작성하라고 한 건 "협박 고의는 없었다"는 이유로 '강요죄 무죄'가 선고됐다. 또 ‘사퇴 제안’에 불응했던 김현민 전 환경공단 상임감사를 상대로 김 전 장관이 ‘표적 감사’를 벌인 점은 강요죄가 인정됐다.
재판부는 “김은경 전 장관이 위법하게 받아낸 사표 제출자가 13명, 공정성을 잃은 임추위 추천으로 임원에 임명된 사람이 15명, 정당한 심사 절차라고 믿고 임원직에 지원했던 선량한 피해자가 130여명에 이른다”며 김 전 장관과 신 전 비서관을 엄중히 꾸짖었다. 아울러,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가치와 성향이 다른 공공기관 임원을 교체하는 게 ‘당연한 관행’으로 인식돼 온 현실에 대해서도 “폐해가 매우 심각해 타파돼야 할 불법적 관행”이라고 일침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