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용으로 쓰일 병상을 확보하기 위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80, 90세 노인들을 나가라고 하는 게 말이 됩니까."
9일 서울 세곡동 강남구립행복요양병원 앞. 치매를 앓는 89세 노모가 입원 중이라는 아들 A씨는 한달 째 병원 앞을 지키고 있었다. A씨가 시위에 나선 건 이 병원이 감염병전담요양병원으로 지정됐기 때문. 서울시는 이달 15일까지 이 병원 병상 307개를 모두 비우라 통보했다. 현재 병원에 있는 환자는 262명. 이중 원래 퇴원이 예정된 이들을 제외한 249명이 감염병전담요양병원 지정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A씨는 "코로나19 때문에 벌써 반년 넘게 면회와 외출이 막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다 환경이 급히 바뀌면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게 의사의 소견"이라며 "정부 방역정책을 이해는 하지만, 저로서는 천륜을 져버려야 하는 문제라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와 환자 보호자간 거리는 좀체 좁혀지지 않고 있다. 환자 보호자들은 대표회를 만들어 릴레이 시위까지 시작했다. 9일 오후 양측이 첫 면담을 했지만, 입장 차이만 확인했을뿐 논의에 진전은 없었다.
보호자들이 퇴원을 거부하는 이유는 환자들의 증상 악화를 우려해서다. 보호자대표회 현모 대표는 “시설이 좋고 진료 능력이 우수한 곳이라 더 갈 곳이 없는 중증 환자들이 6개월씩 대기한 뒤 들어온 게 이 병원”이라며 “여기서 나가라는 건 치료를 포기하라는 의미”라고 했다.
병원 측도 이런 상황을 알기에 어쩌지 못하고 있다. 장문주 행복요양병원장은 "환자 중 90%가 고령·중증이고 평균 2년 이상 장기입원 중인 데다 60%는 치매까지 동반하고 있다"며 "급격한 환경 변화가 있을 시 매우 위험하고 이송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우려도 크다"고 말했다.
서울시의 무성의한 대응이 문제를 키웠다는 비판도 거세다. 지난해 12월 3차 대유행이 시작되고 요양병원에서 감염와 사망이 잇따르자 정부는 부랴부랴 감염병전담요양병원 지정에 나섰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30일 행복요양병원을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지목했다.
병원 측은 5차례나 재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정부의 어려움도 알겠지만 입원 중인 환자의 상황을 봤을 때 내보내기 어렵다는 뜻을 전달한 것. 하지만 서울시는 지난달 22일 서면으로 전담병원 지정을 통보하더니 지난 5일엔 서울에 있는 125개 요양병원의 빈 병상 현황표를 공문으로 보냈다. 15일까지 어서 환자들을 내보내라는 압박이었다.
행복요양병원 측은 병원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란 입장이다. 서울시가 감염병전담병원으로 지정한 강남구의 느루요양병원은 병상가동률이 50% 이하인데다 남은 환자들이 모두 거동 가능한 이들이었다. 구로구 미소들요양병원은 집단감염 발생 뒤라 환자가 50여명 밖에 안 남았은 상황이었다. 한 요양병원 관계자는 "병원별 상황을 세밀히 따져보기보다는 '구립'이란 이유로 낙점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장문주 병원장은 "강남구 소속 구립병원이지만 민간 의료법인이 위탁 운영해 직원들도 공무원이 아니다"며 "전담병원으로 지정되면 사직하겠다는 의료진들이 많아 사실상 병원이 없어질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의료계에선 굳이 감염병전담요양병원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애초에 요양병원은 만성질환자들을 치료하는 곳인데 굳이 급성기 감염병 환자를 받으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불필요한 중간 의료체계를 만들기 보단 기존의 감염병전담병원을 확보라는 게 더 낫다"고 말했다.
이미 서울시가 확보한 전담요양병원 병상이 충분하다는 지적도 있다. 장문주 병원장은 "현재 운영 중인 느루요양병원은 병상이 68개인데 가동률이 16% 정도인 실정"이라며 "지금 공사 중인 미소들요양병원까지 합치면 270개가 확보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