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를 자주 쓰지 않는 요즘 세대는 ‘할거’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굳게 지킴’이라고 한다. 행정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가 바로 ‘부처할거주의’ 이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외국 정부나 UN등 국제기구 문서에서도 ‘silo(조직 간 장벽)를 허물자’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선진국도 유엔도 부서 간, 조직 간 협업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미래사회에서는 한 부처가 전담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보다 2~3개 이상의 부처들이 연관되는 문제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일자리, 저출산, 기후변화, 부동산, 신성장동력 회복 등 최근 정부가 직면한 굵직한 문제들만 떠올려 봐도 그렇다. 이른바 해결이 어려운 ‘난제’, ‘다(多)부처 과제’이다. 문제의 속성 자체도 난제이지만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도 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같은 ‘과’ 내 다른 ‘계’와도 협업이 어려운데 다른 부처와 어떻게 협업을 하겠는가.
정부부처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것이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순진한 생각이다. 외부에서 보면 ‘정부’라는 하나의 단어로 불리지만 각 부처는 전혀 다른 생명체이고 그 안에서도 실, 국, 과는 서로 다른 목표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움직인다. 그러니 청와대와 기획재정부가 재난지원금 앞에서 한몸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고, 국토교통부와 환경부가 물관리와 수자원보호를 위해 선뜻 의기투합하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협업을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였다. 정부업무평가에서 부처를 평가할 때 협업성과를 평가하고, 협업마일리지를 도입하여 조직 내 부서 간 협업도 장려한다. 공무원들이 서로 도우면서 협업포인트를 주고받아 우수공무원을 표창한다. 다부처 공동과제를 발굴하고 집행하도록 협업예산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시적 수준에서 관리수단들이 실제 협업을 촉진하였는지 알기 어렵다. 더욱이 협업으로 만들어낸 성과를 국민들이 체감할 길이 없다. 보다 상위 수준에서 다부처 난제를 위한 협업을 촉진할 수단은 없을까?
미국은 정부업무평가법에 따라 국정운영 성과를 국민에게 공개하고 있다(www.performance.gov). 정부 각 부처별 고유한 업무는 3~5개 전략목표로 정해 성과를 관리하도록 한다. 여러 부처들이 함께 노력해야 하는 중요한 국정과제, 범정부적인 노력이 필요한 정책은 범부처 과제(cross-agency priority)로 정해서 별도로 성과를 관리하고 분기별로 실적을 공개한다. 과거 정부기록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 오바마 대통령 시절 기록 중 ‘기후변화’라는 범부처 과제를 들여다보면 25개 부처 이름이 나열되어 있고 각 부처들이 기후변화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정책들과 그 추진 실적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각 부처 소관업무만 잘 관리하는 것은 과거의 정부운영방식이다. 정책문제를 중심으로 정부조직과 공무원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할 수 있도록 조직운영도, 일하는 방식도, 성과평가 방법도, 국민과 소통 채널도 다 변해야 한다. 국민들에게는 일자리 문제가 어느 부처 소관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해결되는 것만이 중요하다. 조직이 아닌 문제중심으로 정책을 관리하고, 평가하고, 공개하도록 사고의 틀 자체를 바꿔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