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를 이겨내는 홍삼 제품 소개해 드립니다. 양갱과 젤리의 중간 정도로 물러서 엄청 먹기 편해요. 방송 시청하는 분들을 위한 한정 할인. 8만원짜리 제품을 3만원에 드립니다. ”
지난달 25일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모바일 쇼호스트 ‘이다’(본명 윤성희ㆍ54)씨의 쇼핑 방송이 스마트폰 응용 소프트웨어(앱)인 ‘그립’을 통해 송출되자, 순식간에 200여명의 시청자가 몰렸다. 홍삼 제품을 구입하려고 방송을 켠 이들도 많았지만 이다씨를 보려고 들어오는 단골 손님들도 적지 않았다. 이다씨 앞엔 조명과 삼각지지대에 놓인 스마트폰 카메라 밖에 없었지만 온라인 쇼핑의 열기는 어느 홈쇼핑 TV채널 못지 않았다.
그립은 스마트폰 라이브 방송을 통해 판매자와 소비자를 실기간으로 연결해주는 공간이다. 코로나19 여파로 비대면 쇼핑이 증가하자 유명 연예인들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내 많은 팔로워를 보유한 인플루언서 등까지 앞다퉈 쇼호스트로 나서면서 그립은 쇼호스트들의 전쟁터로 불린다. 이다씨는 이런 그립에서도 일명 ‘잘 나가는’ 쇼호스트다. 이다씨는 “올해 국제라이브커머스협회에서 개최한 모바일쇼핑호스트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이야기꾼으로 시청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50대에 들어서면서 은퇴 후 꿈꾸는 인생2막의 키워드는 보안정적인 삶’ 재미와 즐거움’ ‘못 다 이룬 꿈’ 등으로 갈무리된다. 그런데 이다씨의 인생 2막 키워드는 훨씬 도전적이다. “반드시 성공할 거에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잖아요. 저는 이 세상에 제 이름을 남길 겁니다.” 이다씨는 쇼호스트와 함께 시니어모델, 지역방송 진행자, 기업 강사 등의 일도 병행하고 있다. 지난 2019년 6월엔 국제의상페스티벌에 한국 대표로 참가, 전세계 외교대사들 앞에서 한복 의상을 입고 런웨이를 하기도 했다. “그런 열정이 어디서 나오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다씨는 “인생 후반기에 들어서야 행동해야 인생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로 대신했다.
이다씨가 보낸 인생1막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그때 제 인생 목표는 ‘취집(시집+취업)’이었어요. 백마 탄 왕자를 만나 시집가는 게 제가 유일하게 원하는 것이었죠.” 20대 시절 그녀의 관심을 끄는 건 없었다. 남들 다 가는 대학에 진학했고, 학교에서 공예를 전공했지만 큰 관심은 없었다. 부모님에게 떠밀리듯 캐나다로 유학을 갔다. “도피 유학이었죠. 캐나다에서 학위를 딴 것도 영어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어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유학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돼서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인생1막에서 이다씨에겐 직업도, 일도 우연히 얻게 된 ‘덤’이었다. 이다씨는 “제주도 시내에서 쇼핑을 하던 중 지역방송국의 시민 인터뷰에 응했는데, 당시 담당 프로듀서(PD)가 방송 리포터 오디션을 한번 봐보라고 제의했다”며 “인생에서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길거리 캐스팅’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이후 그녀는 원하는 대로 꿈을 이뤘다. 백마 탄 왕자까지는 아니었지만 결혼해 아이들을 낳아 가정을 꾸렸다. “제 30, 40대는 아이의 주변만을 뱅뱅 도는 헬리콥터 맘이었던 것 같아요.”
40대 후반에 잠깐 취직을 하기도 했다. 한 카드업체의 콜센터에서 고객들의 전화를 받는 업무였다. 이다씨는 “무능력한 제 모습에 우울감이 찾아왔다"며 "원하던 결혼을 해서 열심히 살았는데 인생은 제가 원하던 모습으로 변해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사내강사로 일했다. 사내강사는 이다씨에게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해줬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병원에서 암 선고를 받았고, 장기간의 투병생활이 이어졌다.
이다씨의 마음엔 굳고 딱딱한 뭉텅이가 생겼다고 했다. “남들처럼 보란듯이 성공해보겠다는 오기였던 것 같아요,” 치료를 받고 몸이 좀 나아지자 ‘시크릿’ ‘회복탄력성’ 등 서점에 가서 동기부여와 자기계발에 관련된 서적을 보이는대로 사서 읽었다. 어느 날 책장에 꽂힌 자기계발서를 세어 보니 총 300여권이 넘었다고 한다. 사내 강의를 하기 위해 매년 50권 이상의 전문서적을 읽고 리더십 강의를 연구한 결과이기도 했다. “책들을 읽고 나니 가장 좋았던 점은 제 주제파악을 했던 거에요. 동기부여가 돼서 하고 싶은 일들은 많이 새겼는데 제 능력은 턱없이 부족하던 걸 절절히 깨달은 거죠.”
그래도 나이로 치면 이제 겨우 50대 초반. “해보고 싶은 건 다 도전해보자”고 결심했다. 막연하게나마 꿈꿨던 것이 방송으로 사람들 앞에 다시 서는 것이었다. “남이 시켜서 시작한 방송 리포터였어도 그게 제 인생엔 정말 중요했던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지난해 모바일 쇼핑인 라이브 커머스 붐이 일었다. 코로나19로 온라인 쇼핑이 늘어난 덕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본명 대신 ‘이다’라고 짓고 본격 쇼호스트 일에 뛰어들었다. 현재는 상아제약 소속 쇼호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이다는 ‘다행이다’의 뒷말만 쓴 거에요. 제가 인생2막에서야 제 길을 찾았으니 암에 걸렸던 일조차 다행스러운 일 아니었냐는 깨달음이 오더군요."
쇼호스트는 제품 판매에서 얻은 매출의 일정 부분을 얻는다. 이다씨는 현재 모바일 플랫폼인 그립을 이용하지만, 고객들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조만간 더 큰 플랫폼인 네이버 쇼핑에서 활동할 계획이다. 요즘엔 50대 이상의 재취업을 돕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신중년모바일쇼호스트 과정을 열고 강의에도 나서고 있다. 신중년 모바일 쇼호스트들의 라이브커머스 방송은 매주 수요일 오후2시 그립을 통해 방영된다. 이다씨는 “저처럼 뒤늦게 취업의 문을 두들기는 분들이 요즘 많다”면서 “많은 방황을 해서야 지금의 제 자리를 찾은 저처럼 비슷한 처지의 분들이 인생2막을 새롭게 열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