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시 '큰 손'인 연기금이 최근 한 달 사이 코스피에서만 10조원어치 이상을 순매도하고 있다. 지난 5일까지 무려 29거래일 연속 '팔자' 행진 기록도 새로 썼다. 코스피가 3,000선을 다시 내주는 과정에서 국민연금 등 연기금의 매도 랠리가 부각되자, 개인투자자들 사이에선 "누구를 위한 연기금이냐"는 불만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과연 연기금은 주가 상승 속 제 잇속만 챙기는 '얄미운 공룡'인걸까. 업계에선 "쏟아지는 비난이 연기금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7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연기금은 지난해 12월 24일 이후 올해 2월 5일까지 '29거래일 연속 순매도' 신기록을 세우며 이 기간 코스피에서만 10조원을 팔아치웠다. 이는 같은 기간 기관이 코스피에서 순매도한 물량(19조2,000억원)의 절반에 달한다.
이로써 연기금은 지난 2009년(8월 3~9월 9일) '28거래일 연속 순매도' 기록을 넘어섰다. 순매도액도 당시(약 2조6,000억원)의 4배나 더 많다.
반대로 최근 한 달 새 코스피에서 23조5,000억원을 사들인 개미들 사이에선 불만이 터져 나온다. 연기금이 코스피 상승 랠리를 발목잡고 있다는 것이다. 주식정보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선진국보다 저평가돼 있는 국내 주식을 국민연금이 이렇게 내다팔 수 있느냐"는 볼멘소리가 가득하다. 최근엔 '연기금은 증시 대세상승을 막는 행위를 중단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올라올 정도다.
최근 기록적인 연기금의 매도세는 우선 기계적인 대응 성격이 크다. 자산 운용 규모가 큰 연기금은 대개 주요자산별 투자 비중을 미리 정해놓고 움직인다. 가격이 올라 특정 자산의 비중이 커지면 그 자산의 일부를 애초 비중에 맞춰 매도하는 식이다.
실제 국민연금의 자산 배분 계획에서 국내 주식 비중은 지난해 17.3%였는데, 코스피가 가파르게 상승한 결과 이 비율은 지난해 11월 기준 19.6%까지 늘었다. 증권업계는 "국민연금과 달리 이 비율을 공개하지 않는 다른 연기금도 (국민연금과)비슷한 수준으로 국내 주식 비율이 증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올해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비중 목표치는 16.8%로 더 낮아졌다.
지난 10여년 간 연기금이 국내 주식을 사들인 규모를 보면, 최근 매도세는 규모가 크지 않다는 목소리도 있다. 연기금은 2010년 이후 지난해까지 코스피에서만 약 51조원을 순매수했다. 이 기간 연기금이 순매도에 나선 해는 증시 호황기로 불리던 2017년과 2018년, 지난해 등 세 차례에 불과하다.
반대로 개인은 지난해 47조원이란 역대급 순매수를 기록하기 전인 2019년까지 10년간 무려 53조원을 내다 팔았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과거 개인이 주식시장을 외면했을 때 기관투자가가 지수를 보완한 측면이 있다"며 "그 동안 주식을 너무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정리하는 차원으로 해석해야지 이를 개미와의 대결 구도로 봐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업계에선 연기금의 순매도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는다. 하인환 KB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이후 연기금의 순매도 규모가 컸던 건 사실이나, 2008~2009년 대비 주요 연기금의 총 자산이 2배 이상 증가한 점을 고려하면 추가 매도 가능성을 열어둬야 하는 상황"이라며 "내년 자산배분 목표 비중이 공개되는 5~6월까지 연기금 매도세는 지속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