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창을 툭 꽂고 장전 손잡이를 확 잡아당긴 뒤 영점을 맞추는 능숙한 품새가 총을 한두 번 잡아 본 솜씨가 아니다. 결과는 10발 10중. 4일 종방한 JTBC 드라마 '런 온'에서 통번역가인 오미주(신세경)는 육상선수 남자친구인 기선겸(임시완)을 오락실로 데려가 사격으로 딴 경품 인형을 남자친구에 선물한다. 숨겨놨던 총 실력을 뽐내고, 그 '전리품(인형)'을 연인에 안기는 건 군대를 다녀온 남자가 아닌 병역 미필의 여자다. '런 온'은 성 역할을 확 뒤집어 늘 일방통행이던 남성 주도의 연애에 샛길을 낸다. 그 결과, 그 흔한 데이트 풍경이 단숨에 낯설어진다. 대본을 쓴 박시현은 '멜로 달인' 김은숙의 보조작가 출신으로, '도깨비'(2016)와 '미스터 션샤인'(2018) 제작에 참여했다.
'김은숙 키즈'들이 청춘 로맨스 드라마의 문법을 바꾸고 있다. 그간 수동적으로 그려졌던 여성의 연애를 능동적으로 그리는가 하면 남녀의 일을 극의 중심으로 끌어들여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들의 로맨스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서다. '런온'은 육상선수와 통번역가의 일에 대한 열정과 좌절을,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검블유'·2019)'는 포털 사이트 고위직으로 일하는 여성들의 고충을 토대로 현실감 있는 로맨스를 펼쳐 주목 받았다. '검블유'는 '시크릿가든'(2010) 때부터 김은숙 작가와 활동한 권도은 작가가 독립해 낸 첫 작품. 남녀북남의 운명적 사랑에 기댄 '사랑의 불시착'(2019) 등 기존의 주류 로맨스 드라마가 말 그대로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에 가까웠다면, 김은숙 키즈들의 드라마는 '다큐 로맨스'에 가깝다. 유리 구두를 신은 신데렐라는 없다. '런온'에서 잘 나가는 여성 CEO인 서단아(수영)는 운동화만 신는다. "기회라는 게 언제, 어떻게 올 지 모르기" 때문이다.
현실에 뿌리를 내린 김은숙 키즈들의 청춘 로맨스는 '스승'의 전작들처럼 달콤하기보다 '매콤'하다.
'런 온'은 체육계 뿌리 깊은 선수 폭력 문제를 정면으로 꼬집고, '검블유'는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조작 의혹을 과감하게 펼친다. 청춘 로맨스 드라마에선 보기 힘든 사회 부조리 고발로, 이런 폭로는 주인공들의 직업을 부각하면서 자연스럽게 극에 스며든다. 일을 강조하다 보니 남녀 간의 사소한 감정싸움 대신 일터에서 겪는 가부장적인 사회에 대한 염증이 청춘 로맨스의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땔감이 된다. '런온'에서 미주가 더 혐오하는 대상은 기선겸과의 연애를 불허하는 남자친구의 국회의원 아버지보다 성차별적 발언으로 통번역가로서의 길을 막는 스승이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속사포 대사와 도치법 등을 활용한 찰진 대사는 김은숙 작가를 닮았지만, 사랑과 함께 삶의 또 다른 기둥인 일에 주목하고 남녀간의 평등한 관계를 더욱 강조하는 게 김은숙 키즈의 특징"이라고 해석했다. 이날 본보와 서면으로 만난 배우 신세경은 기존 청춘 로맨스와 다른 '런온'의 특징에 대해 "이 시대 여성의 모습을 잘 그려내 더 다가왔다"며 "각자의 다름을 존중하는 이야기"를 꼽았다. 사랑과 일을 균형 있게 그려, 그 과정에서 싫어하는 것을 당당히 밝히고 그것도 존중해주길 원하는 '싫존주의' 즉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 출생)의 바람을 잘 녹여 공감이 됐다는 것이다.
드라마 제작사인 스튜디오드래곤에 따르면 권 작가는 차기작을 준비 중이고, 김은숙의 또 다른 보조작가였던 임메아리는 신작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를 올 상반기(tvN 방송)에 선보인다.
방송가에선 로맨스 드라마 작가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김은숙 키즈 뿐 아니라 '부부의 세계'(2020)의 주현·'미스티'(2018)제인 작가 등 '강은경 키즈'도 요즘 방송가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주현, 제인 작가는 '백야 3.98'(1998)과 '제빵왕 김탁구'(2010), '낭만닥터 김사부' 시리즈로 유명한 강 작가의 창작 집단 글라인 소속 후배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김은숙·강은경 키즈의 부각은 채널이 많아지면서 신진 작가들의 수요가 부쩍 는 시장의 변화 때문"이라며 "신인이지만 김은숙·강은경 작가와 함께 작업하며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방송사와 제작사들이 더욱 그들을 찾고, 창작 시스템도 집단 체제로 바뀌면서 세대교체가 더 빨리 이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